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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Aug 25. 2021

여행의 이유 5가지

여행의 이유는 차고 넘친다. 여행은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인 이동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건 어딘가로 여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설혹 뚜렷한 목적이나 이유가 없더라도 그들의 여정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여운이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순간은 고난과 시련이지만, 어떤 장면은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여행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여행을 한다. 나도 크고 작은 여행길에 올랐다. 내 인생의 여행, 내가 여행하는 이유를 돌아본다.      


1. 자유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자유가 아닐까. 답답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말이다. 집안일은 해도 끝이 없는 것 같고, 출근하면 처리해야 할 업무와 일정, 보고와 회의가 계속된다. 하루하루, 그렇게 반복된다면 지치고 무기력해지기 쉽다. 삶이 어쩐지 지리멸렬해진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럴 때 우리에겐 변화가 필요하다. 도돌이표 같은 일상에서 바람 부는 세상으로 휘리릭 사라지는 거다. 가정이나 회사가 내게 준 역할일랑 잠시 잊고 자유인으로 지내보자. 혼자라도 좋다. 누구의 지시나 잔소리 없이 모든 건 스스로 결정한다. 본캐는 잊고 부캐로, 또 다른 를 맘껏 즐겨보는 것이다.      


직장생활 10년 차에 나는 인생이 바닥을 치는 걸 느꼈다. 뭔가 끊임없이 소모되는 기분, 위기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해외에서 연수할 기회가 생겼다. 그 2년은 내겐 꿈같은 휴식이었고 일상의 의무에서 해방된 자유의 시기였다. 조직은 나 하나 없어도 돌아가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아닌가. 나는 자유인을 만끽했다.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은 바로 이때였을까


2. 발견      


여행은 발견이다.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낯설고 이국적인 세계로의 여행은 설렘과 호기심을 부른다. 눈과 귀는 미지의 풍경에 열리고 색다른 체험의 마법에 빠진다. 여행이 끝날 때면 우리는 집을 나설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은 의미가 사뭇 달라지고, 익숙한 것에서도 특별한 가치를 느끼게 된다. 집과 일상, 늘 보던 사람도 예전과 같지 않다.   

  

코로나 시국은 우리에게 유례없는 고난의 시기다. 그간 숱하게 들었던 '이동 자제령, 여행 금지령'은 일종의 성찰의 시간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잠깐 콧바람을 쐬며 여행하던 우리의 일상은 어느 순간 멈췄다. 자연스레 자신과 대면하는 날이 많아졌다, 가족과 친구, 일상과 여행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되새겨보게 된 것이다.      


코로나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조심스럽게 한 여행이 떠오른다. 동해 두타산의 적막한 무릉계곡을 따라 고즈넉한 숲길을 걸었다. 울진의 망양정 정자에선 시원하게 트인 아득한 바다를 보며 깜박 시간을 잊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이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이란 걸 새삼 느꼈다. 가까운 곳에서 뜻밖에 새로운 눈을 얻은 선물 같은 여행이었다. 여행이 멈춘 2020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선정한 히트상품에 '국내 여행'이 포함된 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두타산과 무릉계곡, 문득 저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3. 인생의 고양


여행은 인생이 고양되는 충만감을 준다. 내 속이 뭔가로 채워지고 삶의 밀도가 높아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어떤 여행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그랬다. 23세 아르헨티나의 평범한 천식환자 의대생은 어느 날 낡은 오토바이를 끌고 여행에 나선다. 남미의 척박한 현실과 길바닥으로 내몰린 이들의 삶을 직시하면서 8개월 뒤에는 혁명가의 눈을 뜬다. 진정한 자신을 찾은 여행이 아닐까.

     

여행은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낯선 여행지에서 잊을 수 없이 생생한, 뜻밖의 순간을 만난다. 거기서 스쳐간 사람들의 정겨운 눈빛과 손길을 마음 한 켠에 오래 담아두기도 한다. 세월이 한참 흘러도 기억 속에 각인된 그런 장면들은 힘든 순간 우리를 어루만진다.      


20여 년 전 여행한 영국의 북부 고원지대인 스코틀랜드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하고 스산한 풍경 앞에 나는 홀연 숨을 멈췄다. 흐르는 시간이 일순, 고정된 장면이다. 인생이 고단할 때면 나는 늘 거기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5월 어느 날은 공주의 갑사에서 혼자 이틀 밤을 보내고 계룡산에 올랐다. 때로는 고독을 지켜낸 시간이 사람을 성장으로 이끈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풍경은 거친 자연이 빚어낸 여행의 백미다.


4. 배움과 세계의 확장


여행은 배우는 것이다. 세상에 관한 흥미롭고 도전적인 공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전엔 몰랐던 데 눈을 뜨고 자신의 세계가 확장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호기심과 탐험 욕구를 자극한  ‘독서와 여행’이다. 그중에서도 여행이야말로 살아있는 공부가 아닐까.

  

2년 간의 해외 연수는 내게 인생공부의 그랜드 투어였다. 여행하는 곳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우선 들렀다. 고흐와 렘브란트, 모네와 피카소를 만났다. 헝가리와 체코에서는 주변 강대국의 위협 속에서 그들의 강렬한 민족정기가 표현된 그림과 운명처럼 마주쳤다. 


나중에 멕시코에서 뜨거운 기운이 비슷한 거대한 벽화를 만났다. 1920년대에 국가의 통일을 기원하며 리베라, 오로스코 등 예술가들이 참여한 문화운동의 현장이었다. 약소국 국민이 느낀 동병상련이랄까. 예술작품 앞에서 여행자의 가슴은 뭉클해졌다.       


그 뒤 업무상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면 다양한 종교문화의 현장을 눈여겨봤다. 이스라엘에 출장 간 적이 있는데 골고다 언덕, 베들레헴 같은 기독교 성지를 돌아본 행운도 따랐다. 스페인 남부와 터키, 인도의 타지마할과 중앙아시아에서 확인한 이슬람 문명은 독특하고 이질적인 데가 있었다. 여러 종교를 만날수록 한 가지 근본정신은 닮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신 앞에 자신을 낮추고 평화를 추구하는 점이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즘(Sufism)의 세마 댄스. 현기증 나는 회전과 몰입의 춤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다. 터키 카파도키아 지역의 동굴 극장에서 본 모습이다.


5. 휴식 


여행의 마지막 이유는 단연 휴식이다.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 낯선 여행지라면 나를 둘러싼 현실을 잊기에도 좋다. 이제 사람들은 행복이 자잘한 기쁨과 만족에서 온다는 걸 안다. 모든 고민과 일거리를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며 쉬고 즐기는 거다. 시간을 붙잡는 이런 기술이야말로 인생의 만족감을 한층 높이는 방법이다.      


휴식을 위한 여행이라면 가급적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걸 추천한다. 명소를 계속 찾아가는 건 관광이지 여행이 아니다. 나는 종종 템플스테이를 찾는다. 도심을 떠나 깊은 산속의 사찰이면 딱이다. 나를 잊고 세상을 잊으며, 무아지경의 멍 때리기에 어울리는 곳이니까. 맑고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숲길을 천천히 거닐어보자.


평소 여행을 할 때도 가능하면 한 곳에서 이틀 이상 머무는 걸 선호한다. 길 따라 계속 움직이는 것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게 휴식에 적절하다. 자주 짐 싸서 이동하면 번거롭기도 하다.        

   



여행에 대한 이유와 동경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여행은 인생에 대한 비유라고도 말한다. 날마다 출퇴근하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만큼이나, 여행하는 인생도 누구나 가까운 데서 느낄 수 있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차츰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서 소소한 여행의 기쁨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행복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여행은 '지금 여기서 행복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여행의 이유를 애써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일단 떠나보자.





 * 표지 사진은 충남 서천의 장항 송림산림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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