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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an 17. 2021

영국에서 놀란 3가지 이유

 

1998년 가을부터 2년간 영국에서 연수를 했다. 중부의 소도시인 Coventry 인근의 대학교. 36살 늦은 나이에 나는 '글로벌한' 세상에 뛰어들었다. 낯선 곳, 불편한 언어, 다인종 다국적의 사람들,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삼시세끼 만나는, 음식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밥과 김치, 된장국이 전부인 '네이티브 코리안'이었다. 해외 생활을 시작하면서 '서바이벌의 일환'으로 요리에 발을 들였다. 가장 만만한(?) 메뉴라고 여겨 레시피를 구한 콩나물국, 미역국, 황탯국 3 총사가 첫 번째 미션이었다. 고향 표 김치를 공수해서 먹고는 했는데 배달 사고로 거의 묵은지가 되어 도착한 적도 있었다. 자취 생활에 조금씩 이력이 붙으면서 나중에는 겉절이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로 일취월장(?)하는 보람도 느꼈다.     


1. 해외 생활에서 가장 먼저 실감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영국은 한때 세계의 중심지였다. 영국 음식이야 '테러블'하기로 유명하지만, 세계 각지 음식점들을 쉽게 찾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객지 생활에 조금씩 녹아들면서 낯선 음식들과 만날 기회도 잦아졌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학교 식당에서는 영국의 흔한 음식이라는 ‘피시 앤 칩스’나 ‘재킷 포테이토’, 간편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기숙사에서는 가끔 리본 모양의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학과 외식에는 인도 음식점에서 탄두리 치킨과 난을,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정통 피자를 맛보기도 했다.      


20여 명의 학과생은 다국적 연합군이었다. 그리스, 스웨덴,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는 물론이고 미국과 대만, 홍콩 등 세계 각지를 대표했다. 급우들을 기숙사로 초대한 어느 날은 불고기와 초밥을 준비했다. 그런데 생선회를 구경하기 어려운 동네라 초밥 재료 조달이 문제였다. 궁리 끝에 마트에서 팔던 훈제 연어를 떠올렸다. 접시에 담아보니 모양이 그럴싸했고 반응도 괜찮았다. 역시 음식은 만국 공통의 언어였다. 당시 초밥은 런던 시내에서 고급 음식으로 인기가 오르던 시절이기도 했다.      


기숙사 공유 키친에서 급우들과의 어느 날 (일본인 여교수님도 함께. 남학생은 덴마크 출신 피터)


영국 생활의 즐거움 중 맥주를 빼놓을 수 없다.


학교 앞 ‘바서티’(Varsity)라는 펍에 갔는데 맥주 종류가 너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거기서 인생 맥주 기네스를 만났다. 진한 간장색의 비주얼. 첫인상은 별로였다. 시원하고 산뜻한 맥주 본연의 맛과는 딴판이었다. 그런데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온몸으로 은근하게 퍼지는 쌉쌀한 맛에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졌다. 분위기 업으로 과음해도 다음 날 아침 속이 편했다. 펍에 갈 때마다 “원 파인트* 오브 기네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파인트(Pint)는 0.568ℓ)     


점차 맥주에 빠져들었다. 아일랜드,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등 나라마다 브랜드가 화려했다. 맑고 청량한 라거부터 맛과 향이 풍부한 에일과 흑맥주까지, ‘고원의 야생마’ 느낌이 나는 10도 넘는 맥주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새로운 맥주를 맛보면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해외여행 때 로컬 맥주를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체코에서 만난 투명한 황금색의 필즈너 우르켈도 잊을 수 없다. 요즘에는 편의점에서 세계맥주를 볼 때마다 추억의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2. ‘토론과 양보로 두 번째 놀랐다.


영국의 학교 수업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다. 보통 강의와 토론이 반반. 세미나식 수업이 기본이고 토론과 발표는 일상이었다. 교실 책상은 질답과 논쟁이 이뤄지도록 마주 보게 배치했다. 우리도 요즘엔 세미나 수업, 학생들 발표와 조별 팀워크 활동 등 참여가 일반화됐다. 하지만 당시 국내 대학원에서 개인 발표 두어 번이 전부인 내게는 무척 생소했다. 더구나 영어가 거시기한 상태라 수업내용을 따라가기 벅찼고 토론은 언감생심이었다. 남들 앞에 잘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다.    

  

마침내 개인별 발표일이 다가왔다. 나는 내용을 영어로 얼추 적어서 외웠다. 발표 마지막에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영어 발표는 난생처음이니 질문은 슬로 템포로 부탁함. 이상 발표 끝.” 다행히 질문은 없었다. 수업 과제로 에세이를 제출할 때면 현지인 전문가의 교정(proofreading)을 받기도 했다. 채점을 거쳐 학생에게 돌려주는 에세이는 교수의 친절하지만 단호한 평가가 부기돼 있었다. 국내에선 본 적이 없어 퍽 인상깊게 느껴졌다. 논리적이다,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주장이 약하다... 등.    


초기 적응에 애를 먹지만 한국 유학생들은 특유의 성실함과 파이팅으로 모범 완주하는 경우가 많다. 유년 시절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에 단련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합숙과 혹독한 훈련으로 무장한 K-팝 아이돌 양성 시스템을 서양인이 따라 하긴 어려운 것과 같다. 차츰 눈칫밥이 늘자 토론도 어느 정도 따라갈 만큼 수업에도 적응했다. 연수가 끝나 귀국한 뒤 영어 쓸 일이 줄어들자, 까먹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운전 습관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좁은 골목길에서 차들이 서로 마주쳤을 때 누가 먼저 갈 것인가. 그들은 자주 상향등을 깜박거린다. 처음엔 놀랐는데, 경고가 아니라 양보 신호다. “유 퍼스트.” 몇 번 경험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상향등을 남발하게 된다. 사소한 것에도 선한 영향력이 따른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우리도 비상등 깜박이는 것이 감사의 표시로 통용되니 기분 좋은 일이다. 또 하나. 수동문을 열 때 뒤에 사람이 따라오는 경우 꼭 문을 잡아준다. 마주친 상태에서 서로 문을 통과해야 할 때 “I insist”라며 끝내 양보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3. 세 번째로 부러운 그들의 모습은 풀뿌리 문화다.


뒷골목까지 스며있는 그들의 생활문화는 부러웠다. 영국에는 서민들의 안식처이자 동네 선술집인 ‘펍’이 참 많다. 펍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 공공장소란 뜻이다. 예전에 마을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토론과 교류가 이루어지던 장이어서 붙은 이름인데, 1990년대엔 6만여 곳까지 성업했다고 한다. 큰 도시 이면도로부터 시골 동네까지 실핏줄처럼 퍼져 있어 어디서나 싶게 만날 수 있다.


영국의 동네 주변과 골목길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펍의 모습

    

영국 생활 중에 여기저기 골목을 다니며 분위기 좋은 펍을 순례했다. 다양한 맥주를 맛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11시에 땡땡땡 ‘라스트 오더’의 종이 울리면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펍은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었다. 일종의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퍼블릭 하우스'가 맞았다. 가끔 집 주변의 후미진 골목에 있는 펍에 갔는데, 의외로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끼리끼리 맥주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고 펍 안에 있는 포켓볼도 즐겼다. 일상의 공간에서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우리의 노년 세대들을 상징하는 탑골공원이나 시골의 마을회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대학교도 커뮤니티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어 흥미로웠다. 학교 내 아트센터에서 본 <노팅힐>(1999)이라는 영화의 상당수 관객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영화에 머리 히끗한 올드 팬이라니... 실버 영화관을 찾는 우리네 어르신들과는 달랐다. 교내 갤러리나 콘서트홀, 체육시설도 마찬가지로 개방적이었다. 대학이 지역주민들과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영국에서 느끼는 차별도 은근히 심하다. 일상생활부터, 주거지나 사회 시스템까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덴마크 출신의 급우인 피터는 졸업 후에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사’ 입사에 실패한 사실을 얘기하며, 유럽인인 자기에게도 벽이 높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하물며 학비도 비유럽권이라고 몇 배를 더  동양인에게는 오죽하겠는가.      


영국에도, 우리에게도 많은 변화가 진행 중이다. 브렉시트 현실화 이후 영국의 미래가 어디로 흐를지 궁금해진다. 그들의 일상이 금방 바뀌진 않겠지만, 양보와 다양성, 풀뿌리 시민사회의 문화만큼은 선한 영향력으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 표지 사진은 연수했던 워릭(Warwick)대학교 학생회관 앞 광장(아트센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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