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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Feb 07. 2021

그해 5월, 홀로 산사에서 나를 돌아보다

- 시간이 멈춘 곳에서 작아지는 연습

2020년 5월에 공주의 갑사를 찾았다.


삼국시대에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절 뒤쪽으로는 계룡산 자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산은 845m로 그리 높지 않아도 산세가 아름답고 웅장하다. 눈이 닿는 곳 끝까지 초록이 짙게 물든 늦은 이었다. 오랜만에 도시를 떠나 맑고 투명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신다. 쳇바퀴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던 일상이 보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템플스테이 2박 3일간 자신과 오롯이 마주 앉았다. 30여 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짐을 정리하고 나온 날이었다.      




지금까지 잘 달려왔다. 가다 보면 어디선가는 멈추게 되는 법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나오기도 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설 때도 있다. 때로 산을 만나고 물을 건너기도 한다. 잠시 길 가에서 쉬거나 산비탈 바위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도 필요하다. 지나간 길에 회한이 남더라도 모두 두고 가자. 천천히, 시간을 어루만지는 기분으로 돌아보면 된다.      


다음 날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진다. 


아무런 소리나 기색도 없이 사위는 적막하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내 속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온몸을 천천히 감싼다. 이내 조금씩 뜨거워지면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새로운 길을 가보자. 이제는 지나온 길보다 지금과 앞으로가 중요하다.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산이 내뿜는 특유의 정기로 예로부터 신비롭고 영험한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계룡(鷄龍)’은 주 능선이 흡사 닭볏을 쓴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능선이 아늑해 보이지만 산속 깊은 곳에 많은 골짜기가 숨어있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화무쌍한 모습을 연출한다.


완만한 경사로를 가볍게 걷기 시작했는데 점차 좁고 가파른 길이 나온다. 폭포를 지나자 계속 돌길과 계단다. 울창한 숲 사이로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골짜기 따라 아득히 이어진다. 문득 산속 깊이 들어와 나도 산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힌다. 갑작스러운 산행이라 다리가 뻐근해오고, 가파른 돌길을 오르느라 발목에 피로감이 쌓이는 것도 느껴진다. 어느새 2시간여 올랐나 보다. 드디어 고갯길 마루다.


갈림길에서 보니 ‘남매탑’으로 가는 안내판이 나온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애틋한 전설의 남매탑, 그런데 그 길은 대전에 가까운 동학사 방면으로 가는, 경사가 심한 하향길이다. 문제는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올라갈 때는 내려올 걸 기약하니 고지가 저기다, 하며 힘을 내는데, 반대라면 왠지 멈칫하게 된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갈까 말까? 언제 또 이 길을 기약할 수 있을까. 급할 것도 없는데, 라며 애써 마음을 다잡고 길을 재촉한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선지 마음이 너그러워지는구나. 4시간  산행하고 돌아와 보니 어느새 점심때다. 허기가 엄습하는 순간이다. 소박한 절밥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둘째 날이 지나자 업무 단톡 방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울려대지 않았던가. 매일 새벽부터 계속되는 일정, 빈틈없이 이어지는 하루, 휴일에야 겨우 한숨 돌리지만 언제라도 예고 없이 사건 사고(?)는 돌출한다. 이제 나는 정적 모드로 전환한다. 조금씩 작아지면서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야 내가 중심이 되는 날이 시작되는 것 같다. 스스로 발신자가 되어 내 인생의 벨을 울리자.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자.     

 



글을 쓰면서 직장을 나올 당시 동료들에게 남긴 인사말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잊었던 꿈들이 되살아납니다.
60대 문학청년의 꿈도 저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해 9월 1일에 브런치로부터 작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인생의 성장은 끝이 없다. 계속 나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오늘도 뭔가 새로운 일을 해나갈 기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하지 않은 일로 하루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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