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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y 30. 2021

걷고 싶은 거리, 놀고 싶은 거리

여행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살던 지역을 잠시 떠나 낯선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여행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여행을 위한 이동 거리가 줄어들고 있다. 짐 꾸려서 먼 길 가는 것만이 아니라 가까운 서도 얼마든지 여행 기분을 즐긴다. 집이나 사무실을 벗어나 잠깐 근처의 카페나 교외의 맛집을 찾는 것이 흔한 풍경 아닌가.     

 

오늘도 길을 떠난다. 출근길에 일부러 조금 일찍 집을 나선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짝 돌아서 가기도 한다. 비가 오거나 궂은날은 전철역이나 지하로 연결된 상가가 안성맞춤 동선이다. 사무실이 종로에 있어 을지로는 자주 가게 된다. 시청역에서 시작해 동대문운동장 근처까지 꽤 길게 이어지는 지하 쇼핑몰이다. 하루에 만 보 걷기가 목표인데 작심하면 금방 몇천 보를 채울 수 있다. 점심 무렵에는 약속 장소에 따라 북촌이나 삼청동, 반대편인 명동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기도 한다.      


주말에는 가볍게 차려입고 동네를 한 바퀴 거니는 게 일상이다. 동네의 오래된 뒷골목이나 후미진 길로 이리저리 다니는 것도 재미있다. 예쁜 카페나 밥집, 독립서점과 소품 가게를 발견하는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집 주변의 대학가 주변을 걷다가 발견한 인도 카레 전문점은 어느덧 단골이 되어 종종 찾는다. 가끔 포장이나 배달로 주문하고.


'스근하다'는 쉽다, 별거 아니다는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이대역 근처 스근한 책방은 글 올린 날이 영업 종료일이었다. 허전한 날, 안에 이삿짐 쌀 빈 상자가 보인다.


아파트 단지나 거리의 큰 빌딩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썩 재미있는 길은 아니다. 키가 큰 건물 사이를 지나다 보면 누군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보는 것 같다. 아니 내가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본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단지 안의 길과 정원은 공원처럼 새로 조성되어 있어 걷기는 편하다. 하지만 어쩐지 정이 가질 않고 인공적인 분위기가 여전하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서면 개발을 비켜 간 빛바랜 건물과 좁은 골목 사이로 옛 정취가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의외로 점집들이 자주 눈에 띈다. 시대는 바뀌고 세상은 달라져도 앞날을 알고 싶은 우리네 마음은 여전한가 보다.       


아파트 사이에 남은 추억의 명소들, 외국인도 환영한다는데 한류 바람과 함께 K-점의 가능성도 있을까.




길을 걷다 보면 어떤 거리는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또 가고 싶어 지는데 어떤 곳은 그렇지 않다. 


왜 어떤 길과 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걷기에 좋을까? 그런 곳은 명동이나 홍대 거리처럼 작은 가게가 밀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넓은 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진 강남대로나 테헤란로는 어쩐지 걷고 싶은 길로 떠오르진 않는다.       


건축학자 유현준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벤트 밀도가 높고 속도는 느린 거리가 걷기에 좋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시선과 체격에 부합하는 ‘휴먼 스케일’이 적용된 작은 건물이 이어진 거리다. 단위 거리당 점포가 많은 곳은 볼거리가 많고 새로운 이벤트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보행자가 만족할 만한 변화를 자주 체험할 수 있다. 강북의 옛 도심과 주거지역이 대표적인데 오랜 세월에 걸쳐 소규모 건물과 점포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반면 강남의 거리는 도시계획으로  건물과 자동차 도로가 중심이고 상가는 건물 내부와 지하로 숨어들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요즘엔 강북의 도심도 재개발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예전 같지는 않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과 걷기에 좋은 거리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많은 곳은 걷기보다는 놀거나 구경하기에 적당할 수 있다. 그런 거리는 대개 먹고 즐기는 데 필요한 가게와 편의시설이 모두 널려 있다. 걷기에 좋은 곳은 약간 다르다. 적당한 볼거리가 있으면서 거리도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비된 곳이다. 약간의 여유와 휴식, 이야기가 있는 거리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최근 자주 가는 곳 중에 놀고 싶은 거리로는 단연 익선동과 종로3가역 근처가 생각난다. 


익선동이야 힙플, 핫플로 이미 알려진 곳이다. 어떤 집은 가격대가 제법 있지만 가성비 좋은 맛집과 명소가 즐비하다. 찾아서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고 나만의 단골집을 만들어가는 것도 추억이 된다. 저녁이나 주말은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게 몰린다.    

 

익선동 풍경과 종로3가역 쪽 청춘의 해방구(?) 같은 길거리 가게들

 


봄철이 지나면서 하루의 긴장이 풀리는 선선한 석양 무렵이면 야외 길목이 인기 최고다. 종로3가역 쪽으로 이어지는 고깃집 바깥 자리와 포장마차는 인파가 꽤 붐빈다. 코로나19로 억눌린 사람들의 피로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탁 트인 곳에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잔하는 것이다. 투명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기울이는 술잔과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코로나 이전 어느 날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자유롭고 활기찬 일상을 하루빨리 되찾으면 좋겠다.      


걷고 싶은 거리로는 서울공예박물관이 있는 안국동 거리에서 정독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길을 꼽고 싶다. 


그렇게 길진 않지만 분위기 있는 돌담길이 덕수궁 오리지널 그 돌담길을 잠시 연상하게 한다. 일방통행길로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지만 걷기에 아늑한 편이고 고즈넉한 느낌을 준다. 덕성여고 끝 쪽에 이르면 익선동처럼 뉴트로 풍의 깔끔한 가게들이 보행자의 눈길을 끈다. 2021년 5월에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은 사진 찍기 좋은 '인스타 명소'에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가 높다.



익선동이 예전 주택가 골목길이라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치는 좁고 정겨운 분위기의 길이라면, 안국동 길은 한결 널찍하여 여유가 느껴지는 데다 하늘로 시원하게 열려 있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걷기에 넉넉하게 긴 거리는 아니지만 삼청동이나 북촌으로 이어지는 갈래길을 골라잡아 계속 걸을 수 있어 좋다. 기분 내키는 대로 길을 걷다가 맘에 드는 가게가 보이면 잠시 숨을 고르면 된다. 언제고 발걸음이 가벼워지면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선다.      


안국동 사거리와 정독도서관 사이의 길 풍경


이런 길이 많아질수록 거리는 아름다워지고 도시는 한층 활기를 다. 길이 있으면 사람들이 찾고, 사람들이 찾다 보면 자연스레 새롭고 멋진 길이 또 만들어질 것이다.




* 표지 사진은 안국동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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