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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Nov 20. 2020

나의 침실을 여행하다

- 일상의 재발견, 코로나 시대의 여행법

2020년 1월에 해외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국내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오기 직전이다. 한국인에게 인기 높은 여행지인 베트남 다낭이었다. ‘경기도 다낭시’라고 할 정도다. 코로나 19로 해외여행은 꿈같은 일이 되고 말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까?  

        

3박 4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거기서 문득 여행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기회가 있었다. 현지 음식을 만들어서 식사를 한 후(쿠킹 클래스) 코코넛 배를 타기 위해 걷는 길이었다. 한 가게 밖에서 본 소박하고 단정한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To Travel is To Live.’


잠시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여행하는 자신이 실감 났다. 처음 방문한 곳이 불현듯 친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가끔 여행하면서 느끼는 어떤 뭉클함이라고 할까.    







코로나 19는 여행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여행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 비즈니스와 경제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지구촌이나 글로벌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쉽게 쓰지만 세계가 하나의 울타리,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지금처럼 실감하는 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마음껏 여행했던 날들이 갈수록 그리워진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 (2004)에서 여행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가보지 않은 먼 곳으로 짐을 꾸려 떠나는 일반적인 여행이다. 두 번째는 가깝고 익숙한 곳으로 가볍게 하는 여행으로, 우리가 사는 일상의 공간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여행 없는 시대인 코로나 시국에 딱 맞는 여행법이 아닐까?       

   

두 번째 방법은 프랑스의 작가인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선구적으로 개척한 여행 방식이다. 드 메스트르는 자신의 방을 여행하고 1796년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두 번째에는 밤에 여행을 떠나 멀리 창문턱까지 과감하게(?) 나아간 후 자매품인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을 펴낸다.      


“야간 여행에서 드 메스트르는 침실에서 문을 잠그고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로 갈아입는다. 그는 짐을 챙길 필요도 없이 방에서 제일 큰 가구인 소파를 여행한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평소의 무기력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소파를 바라보며 그 특질 몇 가지를 재발견한다. 그는 소파 다리의 우아함에 감탄하여, 푹신푹신한 곳에 웅크리고 사랑과 출세를 꿈꾸며 보냈던 시간들을 기억해낸다.”

     

드 메스트르의 책은 여행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의한 고전이다. 

그가 느긋하고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방 안 여행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며 여행의 의미를 묻는다. 진정한 여행이란 낯선 곳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뭔가를 ‘발견’함으로써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오히려 낯설게 보는 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드 메스트르는 군인 출신으로 작가와 화가를 겸한 재능이 많은 인물이었다. <내 방 여행하는 법>은 불법적인 결투로 42일간 가택연금을 받은 김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것이다. 이 책은 18세기 문학사에서 여러모로 선구적인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부피는 작지만 온갖 형식과 주제가 경쾌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문체에 녹아들었다. 훗날 도스토옙스키, 니체, 프루스트, 카뮈, 보르헤스 등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의자란 얼마나 훌륭한 가구인가.
사유하는 인류에게 이보다 유용한 물건이란 없으리라.”(22쪽)     


“침대는 우리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본다.
침대는 우리 인간이 때로는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이나 가혹한 비극을 연기하는 파란만장한 무대가 아니던가.
꽃으로 장식된 요람에서 사랑의 옥좌가 되고 끝내 우리의 무덤 자리가 되는 것이다.”(26쪽)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작가 빌 브라이슨은 현미경을 가지고 집 안 구석구석을 여행한다. 


영국의 더 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예리한 관찰력과 발랄한 문체로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다. 2010년작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는 거실과 침실, 식당, 화장실뿐만 아니라 계단, 복도, 다락방, 지하실, 두꺼비집까지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의 유래와 역사, 이면의 사건과 인물을 샅샅이 해부한 후 세밀화처럼 묘사한다.     


빌 브라이슨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얼핏 보기에는 한없이 하찮아 보이는 집안 구석에 어마어마한 역사와 재미와 흥분–심지어는 어느 정도의 위험–이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말이다. 약간의 호기심 어린 눈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가 여행할 만한 곳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의 대상과 목적지는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집, 우리의 침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 드 메스트르와 빌 브라이슨의 주장이다. 드 메스트르는 눈길과 생각이 이끄는 대로 방안의 침대와 가구, 그림과 음악, 애견과 하인 등을 소재로 현실과 상념을 오가며 여행했다. 100여 쪽의 가벼운 분량에 발견의 깊이와 의미가 담겼다. 반면 브라이슨은 집안에서 만나는 온갖 사물과 관련 인물들의 역사와 인문학적 배경까지 500여 쪽이 꽉 찰 정도로 집요하고 밀도 있는 탐사를 했다.


집안과 주변 여행도 여러 방식이 있다. 슬리퍼를 끌며 발길 닫는 대로 어슬렁거리거나, 운동화의 끈을 약간 조이고 안테나를 세운 채 산책을 하거나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다.      





일상적인 공간을 여행하는 일은 가까운 데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되는 시기에 걸맞은 여행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방안이나 침실을 둘러보면 뜻밖의 발견을 할 수도 있다. 책상 구석의 작고 어렴풋한 낙서, 낡은 상자에 담긴 오래된 편지들, 그중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도 보인다. 빛바랜 추억 속에서 아련히 지나간 청춘의 한 장을 만날 수도 있다. 가끔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까지.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여행은 계속된다. 우리들의 삶이 오늘도 계속되고 내일로 이어지는 것처럼.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부터 눈길을 돌려보자. 문득 여유롭게 길을 걸어가는 당신에게 누군가 소리 없이 말을 걸지도 모른다.


‘여행하며 사는 당신이 행복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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