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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Feb 13. 2021

적막에 싸인 무릉계곡으로 들어가다

- <코로나 시대의 여행> 동해 울진 청송으로 비대면 여행

2020년 5월 말 동쪽으로 떠났다. 


저녁 어스름 무렵에 바다가 저 멀리 보이는 강릉 해안 길을 천천히 달렸다. 길옆으로 이어진 초여름의 논에서는 개구리와 맹꽁이가 제법 우렁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얼마 전 시골의 고향 집을 찾았을 때 저녁마다 들어 익숙해진 자연의 소리다. 고음의 청개구리가 앞장서고 참개구리는 중후하게, 남저음의 맹꽁이가 느릿하게 따라나선다. 서울 도심을 벗어났더니 몇 시간 만에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다. 고향에 다시 온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강릉에는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다. 


사람이 변하듯이, 여행지의 명소와 맛집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걸 느낀다. 예전엔 ‘경포대와 오죽헌’의 고을이었는데 어느새 ‘안목해변 커피 거리’가 강릉의 핫플로 떠올랐다. 변함없이 사랑받는 것들도 있다. 젊은 시절에 강릉의 필수코스였던 초당두부는 지금도 여전히 스테디셀러가 아닌가 싶다.


강릉의 명물 두부가 ‘순두부 젤라토’로 새로 태어난 게 반갑다. 요즘 ‘인기 폭발’이라고 해서 혹시 줄이라도 길게 서야 하나 걱정했다. 다행히 오전 시간이어서인지 한산하다. 담백하고 고소한 초당 두부가 시원하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에 담겼다. 입안에 들어가자 쫀득쫀득한 감칠맛으로 천천히 녹아든다. 오랜만의 여행 기분에 빠져 달콤한 게으름을 즐기는 시간이다. 강릉은 이제 고속열차로 2시간 만에 올 수 있어 미련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진도를 뺀다. 커피와 아이스크림의 도시여, 씨유 어게인.      


끝없이 맑고 푸른 5월의 산하(강원도 홍천 부근)와 순두부 젤라토


동해가 바라보이는 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간다. 


언제 봐도 눈이 시원하다. 시선이 가는 끝까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다. 바다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간다. 동해안에 가면 동해시(東海市)가 있다. 직장 초년 시절 신년 해맞이를 한다고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달려왔던 그곳이다. 이름도 정겨운 묵호(墨湖)와 삼척(三陟)을 찾던 기억이 아련하다. 동해안의 해맞이 명소도 세월 따라 몇 년 뒤 정동진으로 천하 통일(?)되다시피 했다.      


무릉계곡(武陵溪谷)이 보인다.


백두대간의 준령인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약 4㎞에 달하는 계곡이다. 신선이 살았다는 이상향인 무릉도원이 떠오르는 지명이다. 언제고 꼭 가보고 싶었는데, 코로나라는 대재난에 뜻하지 않게 숨어든 피난처 같은 느낌이었다. 하늘은 한없이 청명하고 햇살이 따사로운 계절이다. 나는 계곡을 따라 걸었고 산속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마음은 말랑말랑해져 점차 풍경 속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동해안 제일의 산수’로 꼽힌다는 절경과 기암괴석이 펼쳐진다. 계곡 초입에 있는 너른 무릉반석은 자연의 경이로움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맑고 시원한 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풍류가객들이 놀고 즐기기에 기가 막힌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의 4대 명필가인 봉래 양사언,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와 명문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두타산 맑은 계곡에 너른 무릉반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거진 나무와 숲이 만들어내는 그늘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삼화사(三和寺)가 보인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고찰인데, 후삼국 통일 후 삼국이 화합의 역사를 만들어나가자는 취지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유명하다. 코로나로 연기된 부처님 오신 날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고즈넉한 절집 마당에 서니 청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산길에는 산채 비빔밥집을 찾았다. 깊은 산골의 인심과 넉넉한 자연의 선물이 담긴 밥상이다.   

  


유서깊은 삼화사와 산채 비빔밥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7번 국도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시원한 바다 풍경을 끝없이 볼 수 있다. 어딘가 다른 세상에 왔다는 설렘으로 온몸의 세포들은 아연 기운생동한다. 도로변에는 노란 꽃들이 줄지어 서서 손을 흔드는 듯 팔랑거린다. 국화꽃 같기도 하고 코스모스 종류 같기도 한데,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금계국이나 큰 금계국이라고 한다. 볕이 좋고 건조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5월부터 여름에 걸쳐 밝은 노란색의 꽃을 피운다. 바람 불고 먼지 나는 도로변에 조성한 이유일 것이다. 도로 분리대나 철망 사이를 뚫고 꽃대를 키우는 생명력이 언뜻 보기에도 놀랍다. 바람이 불거나 차들이 질주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환영하는 것 같다.      


울진 망양정에 올랐다. 


차창을 통해 보던 동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의 세상을 풀 스크린으로 가득 채운다. 자연 그대로, 더할 것 없이 그대로다. 일순 모든 것이 정지한 곳에 오로지 자신만이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거침없이 탁 트인 바다가 너무 아득하고 망연했을까. 산과 바다, 마을 쪽으로 놓인 벤치가 외려 여행자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멍때리기 딱 좋은 곳이다. 



국도에서 여행자를 맞이하는 꽃들과 울진의 망양정 풍경


남쪽으로 달려 후포항에서 홍게를 골랐다. 


계절이 더워지는 여름철이라 먹을 만한 것이 마땅치 않다. 저물녘 항구의 가게들은 파장 분위기. 손님이 아무도 없는 허름한 식당에 앉아 바다의 성찬을 즐긴다. 문득 전화벨이 울린다. 고딩 친구의 번호였는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머나먼 이국처럼 느껴졌다. 친근한 목소리였지만 낯선 분위기. 여행지에서 깜박 잊고 있던 어떤 일상의 세계, 현실의 일이 불현듯 다가왔다. 나는 그때 뭔가 새로운 일을 궁리하고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만날 낯선 분위기가 떠올랐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다. 숙소로 잡은 펜션은 푸른 송림으로 둘러싸인 곳, 역시 동해가 지척이다. 와인을 한잔 기울이며 풍경 속에 잠긴다. 밤공기는 제법 서늘하다. 검푸른 바다에서는 살갗을 간지럽히듯 잔잔한 해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후포항의 홍게와 숙소 풍경


바다를 뒤로 하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름만 들어도 초록 분위기의 청송이다. 


그간 소문으로만 들었던 ‘송소고택’에 들렀다. 경주의 최부잣집과 더불어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영남 부호 심 씨 가문의 저택이다. 단아하게 정비된 전통의 가옥들은 세월이 지나도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외지인을 맞이한다.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는 초여름 하늘 아래 인적도 차적(車迹)도 드물다.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고택 체험을 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편안한 느낌의 한옥집이 보인다. 서울 익선동에 있을 법한 뉴트로풍의 카페 ‘백일홍’이다.  


    




쉬어가는 시간,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건 휴식과 자기 위로가 아닌가 싶다. 일단 서바이벌이 중요하니까. 동해안을 따라 우리의 산하 몇 곳을 찾아본 이번 여행은 특별하지는 않아도, 은은한 여운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방방곡곡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코로나19는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찾아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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