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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Dec 20. 2020

내 인생의 여행

- 유년의 추억, 어린 방화범 이야기

부부가 함께 걷고 있습니다.     


요즘 날마다 1만 보를 걷는다. 코로나 19 때문에 마음대로 운동하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어쩌다가 우리 부부는 걷기에 푹 빠졌다. 책 읽어주는 유튜버를 통해 걷기의 방식이나 놀라운 효과에 대해 열공 중이다.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는 말도 있고, ‘파워워킹’이야말로 어떤 운동보다 효과가 크다고도 한다. 퇴근길에는 목표치를 달성했는지 물어보며 우리는 서로를 자극하고 격려한다.      


그런데 걷기는 운동일까? 혹은 일종의 여행일까?


여행에는 점, 면, 선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점(點)’의 여행은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여행이다. 특정한 경관이나 명소, 유적지에 점을 찍듯이 둘러보는 것이다. 수학여행이나 산업시찰이 그랬고, 대개의 패키지 투어 또한 마찬가지다. ‘면(面)’의 여행은 조금 더 넓은 지역이나 장소를 찾아 시간을 보내는 체류형 여행이다. 현지의 사람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효과가 다.  

    

‘선(線)’의 여행은 도로나 기차와 같이 길을 따라 이어지는 여행이다. 제주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이 대표적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도 꿈꾸는 여행이다. 선의 여행은 문득 만나는 주변의 다양한 사물이나 풍경, 사람들과 교감하며 새로운 자극을 얻는다.      


골목길 여행은 선의 여행에 가깝다. 순수하게 걷는 행위는 출퇴근이나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한 이동과는 다르다. 길을 걷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걷기 위한 걸음을 천천히 내딛는 순간 그것은 여행이 된다. 익숙한 공간을 다시 돌아보며 일상을 재발견하는 여행이 되는 것이다. 가까운 골목부터 여행을 떠나 보자. 코로나 19로 여행이 멈춘 요즘, 시간 속에서 추억의 골목길을 찾아 떠나는 것도 좋다.

 



이제 내 인생의 여행을 떠난다. 골목길 여행이다.      

골목길 하면 무엇보다 어릴 적 살던 동네가 떠오른다. ‘유년의 추억’이다.      


내 고향은 영광. 굴비의 고장이다. 요즘에야 한식집에서 실한 굴비 한 마리 맛보는 게 어렵지 않지만, 어릴 적에 굴비는 구경도 못했다. 물론 비싸고 귀했기 때문이다. 영광은 백제 불교가 시작한 곳으로 전해진다.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법성포에 상륙하여 처음 세운 절이 '부처에서도 으뜸'이라는 뜻의 ‘불갑사(寺)’다. 자연스럽게 불교적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지금은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은 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서해안이지만 서해안 같지 않다. 갯벌, 백사장과 절경이라는 바다가 주는 세 가지 매력을 모두 맛볼 수 있다. 오랜 삶의 터전인 뻘이 있는가 하면 송림과 모래밭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고, 동해안처럼 기암괴석이 아찔한 풍경도 그림처럼 펼쳐진다. 백수(白岫) 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이름이 알려진 강추 코스다. 아무 데나 잠깐 차를 세우면 거기가 바로 전망 좋은 '뷰포인트'다. 멀리 칠산바다와 석양을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곳이다. 



불갑사에서 멀지 않은 두메산골이 고향집이다. 


구불구불 시골길을 4킬로미터 걸어가야 학교가 보였다. 등굣길은 힘들었지만 학교 끝나고 집에 올 때는 철마다 길가에 지천인 꽃들도 보고, 여름이면 풍뎅이나 하늘소, 사슴벌레를 찾아 나무에 오르기도 했다. 중간쯤에 있는 넓은 개울에서는 물고기를 잡거나 얕은 물 쪽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다. (땅 짚고 헤엄치기...) 그런데 폭우라도 쏟아지면 넓은 개울은 건너기 무서운 급류로 돌변하여 학교를 공치기 일쑤였다. 상전벽해라고 해야 할까, 큰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경치 좋은 동네라, 요즘은 가끔씩 외지인들이 땅 보러 들르기도 한다.  


2년 가까이 그 학교에 다니다 겨울이 가까울 무렵에 읍내로 전학했다. 학교와 관청가 뒤편의 주택가가 집이었고, 또래들의 아버지는 선생님, 경찰, 군청 공무원이 많았다. 읍내로 오니 자연을 벗 삼아 걷는 들길이 아니라 실핏줄처럼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학교에 다녔다. 어릴 적이라 1시간을 줄곧 걸어야 학교가 보이는 시골길 보다, 좁지만 아기자기한 읍내 길이 좋았다.


그 시절이 그렇듯 골목은 놀이터였다. 


종이로 만든 딱지와 구슬 따먹기 놀이를 하거나 편을 짜서 칼싸움, 총싸움 같은 걸 했다. 골목대장이 되어 신나게 골목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골목길은 때로 좁았다. 큰길에서 시작하여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 길이었는데, 발길은 자연스럽게 산으로 이어졌다. ‘성산(城山)’은 풀이나 잡초, 키 작은 나무들만 있는 옛 토성(土城)의 흔적이 남은 곳이었다. 지금 보니 146미터. 산과 언덕, 마운틴과 힐의 중간 어디쯤 될 높이다.    

 

10살에 나는 방화범이었다.      


3학년 어느 봄날 또래들과 성산에서 불장난을 하며 놀았다. 큰 나무나 숲이 없어 숨을 데가 필요한 총싸움 놀이 같은 걸 하기에는 마땅치 않았다. 어쩌면 불놀이(?)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실제 작은 불이 종종 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피웠던 조그맣던 불이 갑자기 바람을 타고 산 위쪽으로 번져갔다. 하나 둘 겁이 나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옆 동네에 숨어있던 우리는 이윽고 경찰서로 모두 끌려갔다. 우리들의 놀기 패거리에 끼워주지 않아 토라졌던 또래의 동생이 '방화범이 누구인지' 고자질한 것이었다. 다행히 불은 꺼졌지만, 악몽 같은 하루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경찰서 복도에서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벌을 섰다. 두 팔은 높이 든 채로. “저 녀석이 조순경 아들이구먼.” 한 경찰이 우리 중의 덩치 큰 친구를 보며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나중에 일장 훈시를 듣고 어둑할 무렵에야 경찰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요즘 말로 일종의 '아빠 찬스' 비슷한 걸 받았을까, 빨간 손도장을 찍거나 하지는 않았다. 상범이는 경찰 아버지한테 집에서 혼났겠지만.     




오랫동안 유년의 그 골목길과 성산은 잊힌 곳이었다. 지금 성산은 나무가 숲처럼 우거져 옛 모습이 가물할 정도다. 산책길과 체육시설이 조성돼 사람들이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산불 사건이 있고 10여 년 뒤인 1981년에 '성산정(城山亭)'이라는 정자가 정상 부근에 신축되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리고 “성산정이 2002년 3월 초 아이들의 불장난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2011년 8월에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언가 뜨끔하고 철렁했다. 나보다 훨씬 간 큰 후배 방화범이 있었다, 는 사실에 가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유년의 추억은 이제 빛이 바래 어렴풋하다. 행복한 날이었다. 마음에는 근심이 없고 인생에는 무게가 없었다. 세상모르게 천진한 시절의 정겹고 소박한 골목길이다. 골목길에서 멈췄으면 됐는데 산 위까지 너무 달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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