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Dec 18. 2021

투 비어 or 낫 투 비어?

86세의 배우가 열연한 연극 '리어왕'이 화제다.

이순재는 '비공식 최고령 리어왕'으로 꼽힌다.

400년 전의 원작을

3시간 20분간 통째로 옮겼다고 한다.


어렸을 적이 생각난다.

키 작은 내게 선반은 꽤나 높았다.

거기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중에

유난히 특이한 활자의 책이 아직도 기억난다.

쉐익스피어 Shakespere

입술에 힘을 주고 혀를 꽈배기처럼 꼬아야 한다.


고교 시절 다닌 학원엔

얼굴이 길쭉한 영어 선생이 있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를 닮아

매사 재미난 그는 두 가지로 발음했다.

사케스피어 Shakespere

키포인트는 너무 진지하지 않게, 가볍게 웃으며 말할 것.

섹스피어 Shakespere

이때는 앞절에 힘을 주며 조금 빨리 발음하는 게 좋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1980년대

당대의 청순녀 올리비아 핫세가 나온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다.

내게도 언젠가 진짜 사랑이 올 것 같았다.

가슴이 찌르르한 그런  순간이.

나중에 본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기네스 펠트로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나.


허나 세상은 영화가 아니었다.


추억의 셰익스피어 영화들, 한 시대가 많이도 지났구나.


스트래트포드 어펀 에이번이라는

긴 이름의 도시엘 갔다. 그 때가 서른여섯 살.

여왕의 재산이라는 눈부신 백조와 거위가 유유히 호수를 헤엄치고 있었다.

온통 로열의 도시, 셰익스피어는 국보급이었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공연한 '한 여름밤의 꿈'을

로열 셰익스피어 시어터에서 봤다.

봐야 할 것 같았다. 변방에서 온 여행자라면.

영국의 여름은 아름답고 찬란했다.

근데 오후 3시만 넘으면 어둠이 내리는

겨울이란 길고 으스스했다.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칠리한 날씨라니.


그런 날은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진한 간장 같지만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지고

길게 마셔도 다음 날 속이 덤덤하니 괜찮다.

맥주를 마시면 허기가 채워지고 위로가 되는 시절이었다.

댕댕댕,

밤 11시면 펍에선 '라스트 오더'가 울린다.

어느 날 나는 기네스 팬이 되어 있었다.


동네와 골목에 흔한 영국의 펍과 기네스 맥주


이제

아침저녁으로 종로를 지난다.

코로나 때문인지 좀 썰렁한 젊음의 거리에서

오랜만에 그를 만난다.

셰익스비어 Shakes Beer


셰익스피어를 생각하며 비어 한잔 기울인다.

진하고 묵직한 기네스,

온몸으로 사르르 퍼져간다.

이제 50대가 되었을 기네스와 사랑에 빠진다.

오래 잊었던 사케스피어가 갑자기 생각나고

비어는 문득 사케 말고 '비루'가 된다.

뜬금없이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술이 친구가 되는 순간일까.


여행이 사라진 시대

맥주 한잔 마시다 보니

종로에 앉아 세계를 여행한다.

이제 더 이상 쓸쓸하지 않다.

쓸쓸한 것들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삶에는 늘 위로가 필요한 법.

오늘은 셰익스비어로 행복하다.

셰익스비어 인 러브 Shakesbeer In Love


종로에서 만나는 셰익스 비어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가고 어머니 오시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