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May 14. 2022

제주에서 순식간에 떠난 음악 여행

3월 초 제주 뚜벅이 여행에서 가장 나를 사로잡은 곳이 기억난다. 순식간에 나는 음악이 이끄는 시간 여행으로 빠져들었다. 뚜벅이는 자연과 세상을 더 가까이서 만난다. 뜻밖의 장소와도 마주치는 행운이 따른다. 나흘간의 길지 않은 여행이지만 둘째 날에 행운의 장소를 만났다.  


저녁을 먹고 애월의 숙소로 천천히 걸어서 돌아가는데 길가에 불을 밝힌 카페가 눈에 띄었다. 도로는 깔끔하고 가로등은 멀리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은 고요하고 어딘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랬을까. 근데 주차장을 넘어 카페 앞 이면도로까지 차들이 주차돼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LP 바라고 붙여진 음악 카페였다. 전날 언뜻 간판을 본 기억이 났다. 이런 시골 동네 같은 한적한 곳에 LP바라니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올까. 그 순간, 갑자기 여행자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은 뜻밖에도 쉽게,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다. 그게 바로 여행의 매력 아닌가. 그래, 한번 들어가 보는 거야.      


웬걸, 안에 들어선 순간 열기가 가득했다. 빈자리가 거의 없어 겨우 자리를 잡았다. 얼핏 보니 20~30대 젊은 층이 다수였다. 음료를 먼저 주문한다. “기네스, 그걸로 줘요.” 이럴 때 단골 메뉴가 있으면 좋다. 벌써 20년 전, 영국에 잠시 머물 때 나는 기네스에 빠졌었지.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영국의 펍은 적당히 소란스러우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나무가 자아내는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정갈한 숲이 풍기는 듯한 슴슴한 냄새를 즐기곤 했다.


음악을 신청하라고 종이 한 장을 준다. 선뜻 곡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내 기분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뭘까. 여기선 노래를 한 곡만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단 한 곡이라면, 언제나 고르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고 보니 노래방 가본 지도 참 오래다. 내가 어떤 노래를 즐겨 불렀는지, 내 인생의 넘버 원은 뭐였는지. 몇 곡의 노래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영국 체류 중 어느 늦은 가을쯤 맨체스터를 거쳐 리버풀에 간 적이 있다. 맨체스터는 교과서에서 배운 산업혁명의 발상지라기보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프로 축구팀 맨유의 본거지였다. 그리고 리버풀은 바로 비틀스의 고향. 겨울이 성큼 다가온 영국의 가을은 비가 내리며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비틀스 스토리'라고 이름 붙인 뮤지엄에 들렀다. 내 발걸음은 존 레넌의 피아노가 놓인 방 앞에서 홀연 멈췄다. 순백의 피아노는 레전드 뮤지션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삶과 같은 노래 'imagine'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꿈을 갈구하는 그의 눈빛과 담담하면서도 호소력 깊은 목소리가 잔잔한 피아노 곡에 담겨 울리고 있었다. 흑백사진 같지만 아직까지 가슴 깊이 남아있는 장면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문득 인생의 한순간으로 돌아간다. 어떤 노래엔 남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사연이 있다. 낯선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음악은 기억과 감성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내가 신청한 노래가 천천히 흘러나오면 오래 잊었던 친구를 만나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오늘 내 인생에 추억의 그 음악이 기분 좋은 방문자처럼 찾아든다. 아스라한 추억의 순간으로 훌쩍 시간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음악이 매개하는 세계는 이렇듯 즉각적이고 강렬하다. 지금 이런 여유 속에서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다니 행복한 순간이다.



     

검색해 보니 블로그나 인스타에서 나름 핫플이다. 혼행과 혼음의 명소로 꼽히는 카페라고도 한다. 마침 음악 DJ 앞의 테이블에 혼자 앉은 손님들이 눈에 띈다.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국내 가요는 2000년 이전 것만 신청을 받는다고 한다. 요즘 아이돌 노래 틀어달라고 떼쓰는 손님 때문에 애를 먹는다고 하소연이다.  


애월의 밤 카페 풍경 속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재즈 음률이 흐른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정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밤하늘의 별빛이 빛나는 어느 카페의 추억, 고흐의 그림 속으로 잠시 들어간 기분이다. 여행지에서 떠나는 또 하나의 근사한 여행, 음악으로 행복한 밤이다.

 

음악 카페는 낯선 여행지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다. 여행은 인생의 행복한 순간을 만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에서 뚜벅이 여행으로 행복해지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