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가장 오랜 밤을 보낸 남자

내게 녹아있는 당신

by 식이타임

태어난 지 꼭 100일이 되던 날, 아빠는 나를 할아버지 방으로 보냈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할아버지를 위한 일이었다. '중간에 잠에서 깨면 어떡하냐.'는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게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얌전히 잠들었다고 한다. 그날 밤부터 할아버지와 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정말 좋아해 주셨다. 코피라도 흘리는 다음 날이면 한약을 지어오셨다. 동생이 코피를 흘리는 일은 예외였다. 최애음식 굴비 꼬리를 떼어 밥 위에 올려주셨다. 찐 사랑이었다.


방학이 되면 할아버지와 서울 큰 아빠 집에 갔다. 늘 목적지를 오가는 동안 삶의 지혜를 전해주셨는데, '휴게소에 들르면 내가 탔던 버스 번호를 외워두어야 한다.'던지, '지하철역 이름을 외워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한 번은 서울 지하철역에서 할아버지와 엇갈렸다. 나는 지하철에 탔지만 할아버지는 못 탄 것이다. 닫힌 투명문으로 보이는 다급한 할아버지의 입모양은 '가 있어라잉.'이었다. 정말 내가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발역에 내려 큰 아빠 집을 무사히 찾아갔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8살의 기억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가 된다.'는 말이 할아버지에겐 아니길 바랐다. 작은 일에도 고집을 부리시는 모습을 종종 봤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괴리감이 느껴졌다. 미운 감정이 쌓여갔다. 할아버지는 '아이'가 되어가고 계셨다.


어느 날은 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 엄마에게 '어떤 청년이 왔다 갔어.'라고 하셨다. '이러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슬펐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할아버지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걱정을 씻어주는 눈빛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혼자서도 여행을 잘 다닌다. 유럽 기차여행도, 복잡한 도쿄의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좋았던 모습들도, 그리고 한 때는 미웠던 모습들도 '나는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원피스'의 명대사가 있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나에겐 할아버지의 표정, 행동, 말투가 녹아있다.



할아버지는 늘 기억 속에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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