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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가방 속에 든 것

갑자기 무서운 생각

by 식물리에

오랜만에 고속버스터미널에 왔다. 폴바셋에 진득한 라테를 마실 요량으로 신세계 강남점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오는 백화점이라 1층과 지하층을 훑어보는데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티슈에 4B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광화문에서 먹었던 베이글과 라테가 생각나서 고민하지 않고 베이글을 파는 카페인 FOURB(포비)로 방향을 틀었다. 베이글과 라테를 시키고 노트북을 열었다. 평소에는 손으로 끄적이는 걸 좋아하지만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을 다 적어내려면 타이핑하는 게 편할 것 같아 노트북에 정리를 시작했다. 아직 베이글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노트북에 배터리가 없다. 이제야 내가 폴바셋에 가려는 다른 이유가 생각났다. 배터리 충전.


포비의 테이블에는 스타벅스처럼 별도의 충전시설을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벽에 콘센트가 있다. 아주 드물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콘센트에 전원을 연결해본다. 노트북까지 30cm가 모자라다. 하는 수 없이 목을 길게 빼고 콘센트를 사용할 수 있는 자리를 둘러본다. 대각선 앞으로 콘센트가 있는 벽 쪽 바 테이블 형식의 자리가 비어있다. 그런데 어떤 까만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좀 더 둘러본다. 그 가방은 아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저 커플의 남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약 10분 정도 기다려본다. 아무도 오지 않는 걸 보니 커플의 남자의 백팩이 맞나 보다. 서둘러 나의 짐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자리를 옮겨본다.


가방 바로 옆에 나의 노트북을 놓고 하던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 가방의 모양이 신경이 쓰인다. 평범한 까만 백팩인데 가방이 튀어나온 모양이 꼭 가방 안에 약간 길쭉한 동그란 무언가가 들어있는 모양새이다. 별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 가방이 커플의 남자의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계속 이 자리에 있던 가방이면 어쩌지, 가방 안에 동그란 무언가가 만약 사람의 머리통이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럼 목에서 떨어져 나온 이 머리통 옆에서 베이글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머리가 발견되고 나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사에 묘사가 될지 궁금해졌다.


이런 생각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슬그머니 마스크를 벗어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아본다. 베이글과 커피가 없는 지금 내가 또렷하게 어떤 범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 기대하며 한 껏 킁킁대 본다. 다행이다.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내 옆에 커플의 남자가 그들 쪽으로 가방을 옮겼다. 왜 하필 지금일까. 이 자리에 앉은 지 30분이 넘을 때까지 별 신경도 쓰지 않다가 갑자기 가방을 옮기는 걸까. 내가 그 가방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가방 냄새를 맡는 것을 알아챈 걸까. 갑자기 더 무서워짐과 동시에 궁금해졌다. 그냥 이상하게 타이밍이 맞은 거겠지만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찬 나의 머릿속을 들킨 것 같아 서둘러 집에 가고 싶어 졌다. 그리고 그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졌다.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겠거니 하고 호기심을 접었다. 하지만 이 커플이 움직인다면 어느 지점까지는 한 번 쫓아 가보고 싶어 졌다. 과연 저 가방을 열면 무엇이 들어있을까. 당연히 사람 머리는 아니겠지만 나를 이런 생각으로 몰고 가게끔 한 저 조금 길쭉하고 동그란 무엇은 대체 무엇일까. 가방이 치워져 버린 곳으로 힐끗 눈길을 던져본다. 바뀐 가방 위치는 티 나지 않게 가방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 고개를 돌리게 되었는데 하필 남자 커플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 어서 집에 가야겠다. 이 커플이 움직이고 난 뒤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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