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접힌 자국이 없는 텅 빈 종이 위에 고민하며 생각이나 마음을 적어 내려 가던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처럼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기 전에는 감정이 전달되는 시간이 느렸다. 끝내 전해지지 못한 감정들도 있었으며 나도 모르게 와락와락 튀어나오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종이 위에 단어들은 여러 번 혀끝에서 맴돈 다음에나 적힐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정말 많은 편지를 썼었다. 그때에는 그게 유행이었다. 다음 날 친구들에게 편지를 주고 또 그만큼 받아오는 게 학교를 가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일상적으로 편지란 것을 주고받다 보니 그중에 절반, 아니 대부분은 지금 우리가 하는 메신저의 내용처럼 큰 의미도 없고 하루 있었던 일과나 그에 대한 생각 등을 공유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중 몇 번의 편지는 고민 끝에 정성 들여 적어 본 것들도 있다.
지금보다 더 조용했고 더 까맸었던 그 시절 밤,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를 틀고 사각사각 적어가던 편지를 쓰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편지를 받는 사람도 편지의 내용도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괜히 발을 동동거리며 이렇게 저렇게 문장을 만들어내던 그때의 느낌과 어렴풋한 밤의 냄새까지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도 가끔, 아주 가끔 편지를 보낸다. 정말 보내고 싶은 말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잘 지내고 있는 안부를 편지로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평소에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갑자기 연락하기 어색할 것 같다면 너에게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고 싶다는 말을 남긴다. 답장이 오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가끔 답장을 받으면 그날은 괜히 옛날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편지 쓰는 게 유행이어서 정말 많은 다양한 형태의 편지지들이 있었다. 과자나 온갖 상품들을 패러디해서 나름 웃긴 편지지들도 있었고 입체적으로 접어서 만들어야 하는 편지지도 있었다. 그 때로부터 딱 20년이 지났다. 유행이 돌고 도는 패션처럼 편지를 쓰는 행위도 곧 다시 유행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지쳐서 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난 시절의 것들에 열광하는 것들은 드라마나 예능을 통해서도 이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편지 쓰기도 다시 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직접 글을 쓸 일이 줄어든 요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펜으로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 편지를 곱게 접어 마음에 드는 스티커로 봉투를 닫는다. 그리고 출근길에 또는 산책길에 우체통을 찾아 편지를 쏙 넣는 설렘은 꽤 푸릇하다. 요즘처럼 굿즈 제작이 쉬운 때에는 그때보다 더 다양한 편지지, 편지봉투, 우표, 스티커 등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겨울마다 동네 붕어빵 지도를 만들듯 우체통 지도도 만들어지면 재미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 누군가에게라도 편지를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