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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11. 2024

검은 고양이와 자전거와 크로플 14화

갑작스러운 비와 핫초코의 온기

정의는 페달을 밟으며 가던 중, 갑작스럽게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까지만 해도 맑고 화창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짙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오늘은 맑을 거라고 했는데…" 정의는  불안이 섞인 말로 중얼거렸다. 조금 더 불안해지 표정을 하고서 정의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치 곧 비를 쏟아낼 듯 무거운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건 다 그 녀석 탓이야.' 정의는 얼굴을 본 지 반년이 넘은 사촌 오빠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말도 적게 하고, 표정도 드물게 짓는 그 녀석. 오빠라 해주기도 싫지만, 오빠는 오빠니 오빠라고는 해주겠다. 하여튼 얌전한 그 인간은 정의 앞에서만 장난기가 폭발해 버린다. 그렇게 이중적인 녀석이 어디에 쓸모가 있겠어. 정의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의에게만 장난스러웠던 사촌 오빠는 제2종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기상청의 기상예보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 이후로, 정의가 만나는 모든 변덕스러운 날씨들은 사촌 오빠의 탓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정의는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설마 했던 빗방울들은 하나둘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방울씩 맺히던 빗물은 이내 굵어져, 금세 쏟아져 내리는 비로 커져갔다. 정의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옷도, 우산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나선 길이었다. 가방엔 크로플을 담아야 하니, 책을 다 비워냈다. 책을 비운 가방에 비도 예상하지 못한 날씨에 우산을 담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 "어쩌지?" 정의는 잠시 멈춰 서서,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노랫소리는 점점 흐릿하게 반복되며 점점 멀어져 가고, 대신 빗소리가 커져 갔다.


길거리는 금방 빗물로 반짝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의는 조금 서둘러 자전거를 몰며 근처에 보이는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는 크지 않았지만, 차양이 있어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저곳이라면 잠시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정의는 재빨리 자전거를 몰아 카페 앞으로 갔다.


끼익. 비에 젖은 자전거 체인은 높은 소리를 내며 멈춘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카페 앞에 도착해 자전거에서 내린 정의는, 차양 밑으로 피신하며 자전거를 세웠다.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차양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토톡. 그 소리는 마치, 일정한 리듬으로 정의의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키는 듯했다. "하아." 일단은 이렇게 비를 피하고 서 있으려니 잊었던 긴장이 팔다리를 향해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카페 안에서는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따뜻한 분위기에 정의는 이끌리듯 그곳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비라니, 정말 예상 밖이야…" 정의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하늘은 회색빛 장막으로 뒤덮였다. 빗소리는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다 점점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마치 비가 온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기뻐하며 반기는 듯한 리듬이 있었다. 그 소리는 정의의 머릿속에 모든 잡념을 하나씩 지워내고, 고요한 정적 속에 빗소리만이 메아리치게 만들었다. 


비가 내리자 공기는 갑자기 차가워졌다. 빗물의 리듬처럼 숨을 쉬던 정의는 자신의 팔을 가볍게 감싸며 떨리는 몸을 다독였다. 차양 밑에 서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니, 빗방울이 공중에서 떨어져 땅으로 사라지기까지의 짧은 순간이 마치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빗물에 젖은 도시의 도로는 흠뻑 젖은 채 반짝이고,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흙 내음이 스며들어 코끝을 간지럽혔다. 비가 내리면 빗 속에서만 나오는 길의 냄새가 있다. 빗속에 배어든 도시의 오래된 건물과 젖은 나무의 냄새, 그리고 길거리의 아스팔트가 섞인 그 특유의 향기는 어릴 적 비 오는 날을 떠올리게 했다.


"이 비가 얼마나 더 내리려나…" 정의는 흐릿하게 퍼져가는 빗방울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빗소리는 이제 완전히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카페의 차양 아래에서 잠시 몸을 피한 채, 정의는 빗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차양 끝에서 주르르 떨어지고, 지면에 닿자마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흘러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 움직임은 마치 춤을 추듯 가볍고도 우아했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빗소리를 따라 작게 속삭였고, 공기 중엔 묘하게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그 중간 어딘가의 감각이 스며들었다. 물에 젖은 도시의 소리들은 모든 것을 흡수한 채, 그 속에서 차분하고 고요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정의는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빗줄기는 규칙적으로 떨어지면서도 때로는 갑자기 세차게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 구름 너머로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순간, 비와 빛이 함께 어우러진 그 풍경이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갑작스러운 비가 이렇게 기분 좋을 수도 있구나." 정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빗소리와 함께 마음속까지 적셔주는 듯했다.


따릉. 그때, 카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가볍게 울리고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종소리가 정의의 귀를 간질였다. 그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리며, 따뜻한 공기가 정의에게로 퍼져 나왔다. 카페 안에서 나온 사람은 차분하고 포근한 인상의 여성으로 카페의 주인인 듯싶어 보였다. 왠지 그분이 나오자마자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정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놀랐지요? 조금만 기다리면 그칠 비니까, 잠시 카페 안에 들어와 있어요."

정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가 정의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지만, 선뜻 안으로 들어가기는 망설여졌다. 그러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그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정의는 결국 카페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정의는 가볍게 인사하며 자전거를 차양 아래에 단단히 세워두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부드럽게 퍼져 나오는 커피 향이 정의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바깥의 차가운 비를 맞은 몸이 금세 녹아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곳은 세월의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는, 고유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장소처럼 보였다. 유행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오래된 나무의 향과 차분한 색감이 어우러진 카페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입구 옆에는 손으로 정성스럽게 쓴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각 음료와 디저트의 이름은 정갈한 손글씨로 적혀 있었고, 메뉴 하나하나에 사랑스러운 작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카운터 너머로 보이는 커피 머신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고, 바리스타는 한쪽에서 고요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 과정이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느껴져 정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커피가 추출되는 소리, 우유를 데우는 소리, 그리고 잔에 따르며 퍼지는 향기가 천천히 그녀의 감각을 깨워주었다.

카페의 인테리어는 정갈하면서도 소박했다. 세월이 깃든 듯한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은 여기저기 약간의 흠집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신선한 들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벽에는 작은 액자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그 속에는 카페를 찾았던 손님들이 남긴 따뜻한 손글씨와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정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 액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여기는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벽에 걸린 문구들 역시 소박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글귀들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라든지, '한 잔의 커피가 전하는 온기' 같은 다정한 말들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흐린 빛이 카페 내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고, 빛이 머무는 곳마다 따뜻함이 감돌았다. 정의는 창문 가까운 자리를 선택해 앉았다. 비가 내려 흐릿하게 보이는 창 너머로, 바깥세상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평온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카페의 목재 바닥을 스치는 발걸음 소리는 부드럽고 조용했다. 손님들은 대부분 혼자 앉아 있었고, 각자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곳은 외부의 소음과 분주함에서 한 발짝 떨어져,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공간이었다. 비가 내리는 창문을 배경으로 커피 잔이 김을 내뿜고 있는 풍경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정의는 잠시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천천히 음미했다. 커피의 향기, 빗소리, 그리고 아늑한 카페의 따뜻한 공기. 마치 세상이 천천히 멈춘 것만 같은 이 순간,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여기 앉아 있어요. 비가 그칠 때까지 천천히 쉬고 가도 돼요." 카페 주인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정의를 맞이했다. 그녀는 정의를 조용한 창가의 자리로 안내하며, 특별 메뉴라며 따뜻한 핫초코를 내왔다. 하얀 머그잔에 담긴 핫초코 위에는 작은 마시멜로 세 개가 동동 떠 있었다. 하얀 마시멜로가 초콜릿 위에서 천천히 녹아가는 것을 보며 응어리 질 만한 것도 없었는데, 뭔가 풀리는 것 같았다. '몽글몽글' 


정의는 조심스럽게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럽고 달콤한 초콜릿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몸 안에 쌓였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 나갔다. "정말 따뜻해…" 정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카페 주인이 권한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정의는 따뜻한 핫초코를 천천히 음미했다. 주인의 말대로, 이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정의는 창 밖을 바라보며 내리는 비를 보았다.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창 너무 카페 안으로도 공기가 맑아지는 듯했다. 카페 주인의 손에는 새까만 커피가 담긴 컵이 들려 있었다. 그 커피에서는 약간 시큼한 향이 올라왔다. 그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듯한 까만 향기는 그녀의 주위를 깊게 머물고 있다가, 그녀가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을 따라 그녀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핫초코를 다 마실 때쯤, 비는 점차 잦아들었다. 정의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핫초코 값을 지불하려고 했지만, 카페 주인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예쁜 아가씨랑 함께 차 한 잔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종종 놀러 오세요."


정의는 카페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카페 차양 밑에 세워둔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며, 정의는 이 가게의 위치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이곳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꼭 다시 와야지.' 정의가 자전거에 올라 출발하자, 창 너머로 카페 주인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의는 활기차게 외치고, 천천히 페달을 밟아 다시 길을 나섰다. 몸이 따뜻해진 것을 느끼며, 입안에는 아직도 핫초코의 달콤함이 남아 있었다. 정의는 그 맛을 음미하며,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이런 곳도 있다니… 다시 오고 싶어." 정의는 속으로 다짐하며, 크로플 가게로 향해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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