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파 소녀와 길 잃은 강아지
정의는 자전거를 타고 경쾌하게 길을 달리던 중이었다. 길에서 떠 살짝 든 고개로 건물의 틈사이로 지나 온 저녁 햇빛이 닿아왔다. 바람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고, 햇살은 밝고 따뜻하게 정의의 등을 감싸주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푸르른 잎을 흔들고 바람에 속삭이는 소리의 사이로 정의가 지나가는 사이, 멀리서 새들은 이 날의 마지막 지저귀는 소리를 청명하게 울렸다. 정의는 이렇게 좋은 날에 크로플을 먹으러 가는 자신의 선택이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멋진 날엔 밖에 나와서 크로플을 먹어야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중, 저 앞에서 작은 흰색 점이 정의의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비둘기인가 했지만, 점점 가까워지자 그것은 조금씩 털복숭이가 되어 갔다. 길을 잃은 듯이 방황하던 강아지는 하얀 털이 복슬복슬하고, 눈은 긴 털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움직이는 작은 털뭉치 같았다. 정의의 본능에 맞춰 정의가 탄 자전거의 속도는 점점 줄어갔다. 강아지에 가까워지는 정의를 눈치 챈 강아지는 정의를 바라보았고, 강아지와 눈이 마주친 정의는 결국 강아지 앞에서 멈춰 섰다. 강아지는 정의를 보자마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그 작은 다리로 폴짝폴짝 뛰며 정의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정의의 마음은 순간 약해졌지만, '아냐, 안돼. 난 만지지 않을거야. 쓰다듬지 않을거야.' 그녀는 강아지를 만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고양이파거든. 배신행위는 안 돼.’ 정의는 속으로 다짐했다. 정의에게 강아지파라는 것은 고양이파로써는 인정하면 안되는 것이었고,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강아지와 고양이 둘 모두를 좋아할 수 있겠어.' 정의는 고양이들이 보여주는 도도함과 독립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정의가 고양이들을 예뻐하는 만큼이나 고양이들은 정의에게서 멀어졌었다. 길을 가다 만났던 고양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의의 손길을 외면만 해왔었다. 지금 정의의 주변을 돌면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면서도 고양이를 떠올리고 마는 정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고양이파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강아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도 거리를 유지했다. 강아지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정의는 고양이들에 대한 충성을 지켜냈다.
강아지는 정의 주위를 맴돌며 계속해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작고 검은 눈. 동그랗다 못해 땡그란 작은 두 눈은 긴 털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뭐니, 정말." 정의는 자신이 강아지와 이렇게 가까이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주인을 잃고 혼자서 정의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강아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 손을 뻗었다. '토리.' 앞에는 이름이 적혀있던 목걸이의 뒤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정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목걸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띠리리리-
신호음이 몇 번, 몇 번 반복되는 동안에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정의의 핸드폰에는 오랫동안 신호음만 길게 울렸고, 그러다 결국 음성메시지 보광 서비스로 연결되었다. 정의는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지.' 강아지의 주인이 전화를 받지 않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정의가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있는 동안에도 토리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는 정의의 시야에 가만히 있었다. 끼잉 끼이잉. 얘는 짖지도 않네. 짖을 생각도 없이 벌린 입 사이로 끼잉 거리는 신름만 흘리는 강아지를 보며 정의는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정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강아지는 계속해서 정의의 다리 옆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정의의 복잡한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듯한 강아지 토리는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어떡하지?’ 정의는 주위를 둘러보며 강아지를 맡길 만한 사람이나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밤에 접어들 준비의 시간이어서인지 길거리는 한산했고, 마땅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한번 강아지 목걸이에 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정의는 결국 쪼그려 앉아 토리와 눈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너, 네 주인이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물론 토리가 대답할 리는 없었다. "모르나 보네." 말해주면 좋을텐데. 토리는 그저 꼬리를 흔들며 정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정의는 토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주인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지만, 점차 날씨 이야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 등 일상적인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지. 나는 수학이라는 게 왜 있는지 모르겠어. 너랑 나. 이렇게 둘. 뭐 그 정도만 셀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냐? 필요할 땐 계산기를 쓰면 되니. 수학은 도대체 누가 만든거래..."
왈. "어머, 너 말도 하는구나." 왈왈.
"그래, 넌 이름이 뭐니? 아니 토리였지. 토리야. 넌 어디 출신이니? 여기 출신이니? 네 엄마도 복슬복슬할까?" 끼잉.
토리는 지치지도 않고 정의의 앞에서 폴짝폴짝 뛰며 애교를 부렸다. 정의는 이런 상황이 조금은 귀찮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토리가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를 잘 따르는 걸 보면, 나도 이 강아지랑은 잘 지낼 수 있을까?’ 정의는 잠시 생각했지만, 곧 고양이파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기하며 그 생각을 접었다. '안돼.' 안돼지.
그때 저 멀리서 “토리야!”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정의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한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단발머리에 운동복 차림이었다. 손에는 토리 목줄을 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목줄 끝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여자는 귀에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었고, 숨을 몰아쉬며 정의에게 다가왔다.
"아, 감사합니다! 토리를 돌봐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여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토리는 주인을 보자마자 더욱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방금 전까진 나한테 꼬리를 흔들었으면서. 정의는 살짝 상처받았다. 너무하네. 토리 주인은 기쁜 마음에 토리를 안아 들고, 한껏 안심된 표정으로 정의에게 다가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해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놀란 이 녀석이 목줄을 끊고 도망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저도 놀라서 얘가 떨어진 줄 모르다가 나중에야 알았어요." "강아지가 참 예뻐요. 다행이에요." 강아지를 찾아서 다행이다. 정의는 그렇게 말했지만 토리 주인은 강아지가 예뻐서 다행이라는 건가 하며 헷갈려졌다. "저, 사례 하고 싶어요." 여자는 명함을 꺼내 정의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정의는 명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꼭 받아달라며 그녀의 손에 명함을 쥐여 주었다. '한밤의 맛'. 명함에 적힌 가게 상호는 따뜻함이 풍겨나오는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한식, 식사, 따뜻한 술과 안주. 난 술 마시면 안되는데. 정의는 난감해졌다.
"저희 가게로 꼭 한번 놀러 와요. 맛있는 밥도 있어요." 토리 주인은 한쪽 눈을 살짝 감으며 정의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한테는 특별히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 정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며 그녀는 주인을 되찾은 토리와 주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나는 고양이판데.' 멍. 그러고 보니 토리는 헤어지는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짖었다. 강아지가 짖는 것을 찾아내다니. 정의는 고양이파라는 사실이 흔들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안돼, 안돼. 초코가 알기라도 하면 안돼.' 초코는 정의네 집 근처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까만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고양이의 주인이 지은 것도 아니고, 고양이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새까만 밤 같은 고양이를 마주칠 때마다 만져보려고 달려드는 정의가, 고양이를 불러보려고 지은 이름이었다. '고양이들에게 배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겠어.' 정의는 속으로 다짐하며 페달을 밟아 크로플 가게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