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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Sep 09. 2024

백의 벽 01화

진단의 날

11월 17일, 이 날은 영욱의 인생에서 가장 날카롭고 치명적인 날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영욱을 유럽으로 보낼 예정이었던 자전거 대회는 영욱의 왼쪽 다리뼈에 금을 가게 했다. 영욱의 왼쪽 다리뼈에 생긴 금은 어쩔 수 없이 영욱에게 피할 수 없는 각종 검사를 하게 만들었고, 단순히 형식적이었던 검사들은 점차 소란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골절로 여겨졌던 영욱의 병명은 검사를 반복하는 동안 심각성을 더해갔다. 삼일째를 맞이한 병원에서의 생활이 계속되면서, 영욱은 점점 더 이상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서진 다리보다 더 깊고, 더 고통스러운 것이 그의 몸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영욱은 통증과 불안 속에서 잠시나마 평화를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자전거 사고 후 부서진 다리의 통증은 처음에는 참을 만했지만, 그 통증이 그의 전신으로 퍼지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의사들은 골절이 치유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영욱은 뭔가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삼일째인 오늘,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다가오는 의사와 마주했다. 의사는 평소와는 다른 표정으로, 침착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욱 씨, 교모세포종입니다. 뇌에 종양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말이 영욱의 귀에 들어왔을 때, 영욱의 모든 세상은 멈춘 듯했다. 그의 마음은 격렬하게 흔들리며 혼란스러웠다. 자전거 대회에서의 사고, 다리의 통증, 그리고 이제는 그의 뇌에 생긴 이 암의 확산. 모든 것이 서로 얽혀서 그를 질식시키는 듯했다. 영욱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릿속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게… 정말인가요?” 영욱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네. 환자분의 검사 결과..." 의사의 입술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그의 귀에 닿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마치 다른 세상의 언어처럼 들렸다. 그는 이 상황이 현실이기를 거부하고 싶었다. 꿈에서 깨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의사의 얼굴에서 읽히는 것은 그의 최악의 상상이었다. 영욱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영욱에게 의사는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영욱은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서는 자전거 대회에서의 쾌감과 자유로움이 떠올랐다. 든든한 페달, 세상 어떤 것도 부숴버릴 수 있을 듯이 두터운 허벅지.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였다.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와 도전이 이제는 먼 꿈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무너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의 내부에서 절망이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의사 무리들은 병실을 빠져나가 있었고, 병실에 남은 영욱은 다른 환자들 사이에서 오도카니 제 병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손은정 간호사가 조용히 들어왔다. 차트를 살펴보던 그녀는 영욱의 표정을 읽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힘드시겠지만, 저희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영욱은 그녀의 목소리와 은정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깊은 검은빛의 눈빛에는 영욱이 찾아내기를 바라는 한 줄기 위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위안도 그가 느끼는 절망의 깊이를 완전히 덮을 수는 없었다. 영욱은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그의 머릿속에는 치료와 회복에 대한 희망보다는,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은정 간호사는 영욱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그 말은 짧지만, 영욱에게는 그 어떤 치료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체온에, 은정 간호사의 따뜻하지만 뜨겁지 않은 열기가 영욱의 몸에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는 암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그는 모든 것이 더 이상 확실하지 않고, 모든 것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영욱은 이 불확실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혼자서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의 손은 떨리고, 가슴은 조여 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의 삶은 이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으려 했다. 


'살고 싶어.' 


그러나 그럴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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