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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26. 2024

약들이 켜켜이 -2

너는 누구라도 왔지, 나는. 

일요일 아침. 


내가 있는 별스럽지 않은 이 병실은 토요일보다 더 조용했다. 아직 남은 대청소의 일정이 약간 소란하긴 해도 주말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활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나는 창문 너머로 부산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병원 생활이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이제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재미를 찾는 나를 발견했다. “하아...” 당분간은 여기 있어야 하니, 이 안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볼까. 의사 선생님들은 아마 환자가 돌아다니는 것이 싫은가 보다. 한 입에 털어먹은 약봉지 속에는 약의 양이 주중보다 한두 알 많아진 것 같았다. “으음..” 


종이에다가 병원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지 고민하고 있다 보니, 약에 수면유도제라도 있었는지 그대로 앉은 채로 잠들어 버렸다. 선잠을 자다 눈을 떠 보니 벌써 훌쩍 지나버린 시간. 내가 선잠을 자든말든 병원의 아침은 무척 빨리 진행된다. 오늘도 어제처럼 박선진 간호사가 아침 라운드를 돌러 들어왔다. 박 간호사. 차갑게 얼어 붙어 있는 듯한 그녀의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새빨간 하트 모양의 핀이 그녀의 옷깃에서 반짝였다. 그녀는 12호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환자 하나하나의 상태를 체크했다. 무섭다거나, 표정이 딱딱하다거나 그런 말은 있어도, 박 간호사는 환자를 세심히 살핀다. 휙. 오늘도 세상 다 끝난 듯한 표정을 하고서 창문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영욱이의 상태를 체크하고선 박 간호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헉.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낸 것 같다. 들렸나? 화 났나? 나도 혼나는 건가? 은정 간호사 도와줘요.      


"오늘은 어때요? 불편한 곳은 없나요?" 그녀가 묻는다. 대답해야지, 기준아. 

"네, 오늘은 괜찮아요, 별로 안 아프네요. 약이 잘 받나 봐요. 여기 약이 좋은가, 잠도 잘 잤어요," 미소를 유지하려고 하며 대답을 했다. 그런데 너무 빨리 말한 것 같은데. 저기 건너편에서 정혁이 형이 나를 쳐다보며 능글능글한 미소를 짓고 있다.      

옆에서 각 잡힌 자세로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던 우철이 끼어든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그래도 밖에 나가서 운동하고 싶어요," 다리가 부러진 녀석이 의욕도 성하군. 박 간호사를 흘깃 보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박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오늘도 좋은 날씨라서 환자분들이 더 편안해하시는 것 같아요." 

정혁이 투덜대며 "날씨가 좋다고 해서 우리가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정혁이 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박 간호사는 정혁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예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아도 보인다. 


나는 박 간호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날씨가 좋으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긴 해'라고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창 밖을 보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생길 것 같았던 기분 좋을 ‘어떤’ 일은 점심 시간이 되도록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점심 시간이 지나고 병실은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바닥을 닦는 청소 이모가 다녀가고, 간호사들이 몇몇 들렀다. 주말이라 해도 병원에 별 다른 일이 있을 리가 있나. 병실을 둘러보니 저기 끝에 있던 동훈인가 하는 친구는 어디론가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팔팔하네.’ 날씨도 좋은데 나도 나가볼까. 


근데 뭔가 움직여 보려 해도 목적이 있어야지. 갈 곳도 없는데. 병원이나 돌아다녀 볼까나. 그때, 나이가 좀 있는 아저씨가 한 분 병실로 들어왔다. 보아하니 두리번 거리다 바로 우철의 자리로 향하는 것을 보니 우철의 삼촌인 듯 했다. 며칠 전 부모와 통화하던 우철은 병원에서 필요할 물건을 삼촌이 가져온다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었다. 우철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그는 부산의 한 중견 기업에서 근무하는 것 같다. 근데 묘하게 군인 느낌이 나는데. 의욕이 넘치는 군인 다운 우철에 비해 무뚝뚝한 성격에 표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부산 남자, 부산 아저씨였다. 옆에서 보는 둘의 모습은 제법 그림이 되었다. 실제 둘의 속마음이 어떤 지는 몰라도, 말 없이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듯한 모습. 제법 그림 같다.      


"우철아, 괜찮냐?" 삼촌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네, 삼촌. ” 우철은 삼촌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깔며 계속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철은 평소와는 달리 의욕이 없어 보였다. 왜 저러지? 가족 사이에 긴장을 하나. 그러다 생각이 닿은 것은, 군대 축구를 하다 입원까지 했다는 것이 쪽팔려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며 '저 사람, 정말 말수가 적구나'라고 생각했다. 손에 무겁게 들고 있던 가방을 병상 옆에 두면서도 “여기 있다” 정도만 말하고, “속은?” “다리는?” “밥은?” 하고 문장도 되지 않을 짧은 단어만 늘어놓았다. 저 정도면 진짜 군인 아닌가? 나는 그들의 대화가 너무 짧아서 오히려 어색함을 느꼈다.

용환은 잠시 우철을 바라보다가 "아프다고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나아서 복귀해라,"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삼촌. 하시는 일은 잘 되고 있나요?" 우철이 물었다.

삼촌은 짧게 "응, 그럭저럭이지"라고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후 삼촌은 우철에게서 시선을 떼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다시 시선이 우철에게 도착했지만 삼촌은 그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직 고개를 들지 않은 우철이 애써 입을 열었다. 

"그래, 다음에 또 올게," 우철의 인사에 잠시 말이 없던 삼촌은 그렇게 말하고는 병실을 떠났다. 나는 그가 떠난 후 우철의 표정이 조금 더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우철의 삼촌이 나가고, 우철은 이불을 덮어쓰고 병상에 누웠다. 무슨 이야기일까. 뭔가 속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자” 그때, 건너편 병상의 정혁이 환호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참... 뭐 게임하다가 아이템이라도 잘 나왔나 보네. 특별히 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럴 땐, 자야 한다. 병원에 있을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퍼져 지내겠어.           

저녁 시간이 되자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박선진 간호사가 퇴근을 준비하며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고, 백소희 간호사는 저녁 약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때, 주치의로 보이는 의사가 옆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또?’ 나는 살짝 놀라며 "의사 선생님이 또 왔네요?"라고 물었다. 

백 간호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네, 그러네요. 원래는 주말에 주치의가 잘 오진 않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근데요.” 누워서 게임을 하는지 티비소리보다 크게 효과음을 울리던 정혁이 관심을 보이며 "대체 뭐가 문제길래 이렇게 자주 오는 거죠?"라고 물었다.

어느 새 앉은 자세로 돌아온 우철도 침대에 앉아 "응급 상황이라도 생긴 건가?"라고 궁금해 했다. 백 간호사는 계속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며 약을 정리했다. 내가 먼저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 난 안 궁금한데.      

옆 병실에서 또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더 큰 소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했고, 병실 내의 다른 환자들도 슬슬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뭔가 사람이 내는 신음인가 작은 비명 같은 소리도 들린 것도 같고. 병원에 있다보니 저런 소리 하나하나가 내 이야기가 될 것만 같아서 생전 없던 불안이 피어나고 있었다. 

 

"큰일이 생긴 것 같네요," 내가 조용히 말했다. 어느 새 12호실의 모두는 복도로 열려 있는 병실 문을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늘 별다른 말 없이 누워만 있던 영욱도 조용히 그 소란을 듣고 있었나 보다. 영욱도 다른 환자들처럼 병실의 문을 향해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왠지 그 눈빛이 더욱 차가워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방의 소란이 가라앉고, 어제의 그 의사가 다시 12호실로 들어왔다. 그는 가볍게 병실을 둘러보며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는 조용히 차트를 체크했다. 이 방에 이 의사가 담당하는 의사가 있었던가. 

"오늘 상태는 어떠신가요?" 시선은 여전히 차트에 두고 있는 의사가 물었다. 

"네, 큰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옆 병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그냥 간단한 검사 때문에 온 것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짧게 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으려 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이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나? 환자가 많이 아픈가?'라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니 별 것 아닐 수 있는 일에 일일이 반응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쩐지 아까보다 왼쪽 다리가 더 아픈 것만 같다. 그나저나 퇴원은 언제나 할 수 있을까.           

  

밤이 되자 병실은 조용해졌다. 성우철은 하루 종일 삼촌과의 짧은 대화가 마음에 걸린 듯했다. 나는 그가 침대에 누워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철아, 무슨 생각해?" 내가 물었다.

우철은 한숨을 쉬며 "삼촌이 왔는데, 너무 무뚝뚝하셔서… 화가 나신 것 같기도 하도. 좀 서운했어요,"라고 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삼촌도 걱정해서 온 걸 거야." 그러고 보니 “넌 경상도 출신 아니었나?” “네? 맞아요. 저 창원에서 자랐어요.” “아, 거기.” “네, 거기요.” 나는 창원하면 떠오르는 예전 여자친구를 떠올렸는데, 우철이는 뭘 떠올렸으려나.      

우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삼촌도 걱정해 주시는 거겠죠. 그냥 좀 다치고 아픈게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냥..."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래도 삼촌이 와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바빠 보이시는데"라고 격려했다. 나는 아무도 찾지 않았는 걸. 주말에 아무런 방문객도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우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 없는 동환과 누워서 창문만 보는 영욱을 제외한 여섯 개의 시선이 우철을 향해했다.      

  

우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요, 형. 내일은 좀 더 좋은 날이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래, 그럴거야.”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이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아직 창 밖은 충분히 밝았지만 나는 잘 잠들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잘 수 있는 시간이 많은 때를 놓치면 안돼거든. 아무 일 없는 날, 생각해보면 이런 날이 가장 좋은 날이 아니었을까. 

 

왠지 자리에 눕기 전 먹은 약이 잘 받는 것 같다. 이거, 좋은 꿈을 꿀 수 있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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