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요루를 쓰다듬을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골골송이 25헤르츠의 저주파로 내 손바닥을 간질인다. 부드러운 하얀 털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 그 온기가 내 손끝 모세혈관까지 스며든다. 살과 살이 맞닿는 접촉면에서 모든 것이 투명하게 교환된다. 번역의 필요도, 해석의 여지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소통—언어 이전의 원시적 교감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 완벽함을 포기하고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선택했을까? 우리는 매일 수천 개의 암호를 생산하며 살아간다. "고생 많았어"라는 인사 속에 숨은 '빨리 끝내고 싶다'는 속마음, "나중에 얘기해"라는 문자에 암호화된 거부의 신호들. 언어는 우리를 연결하면서 동시에 분리시키는 역설적 존재다.
생선마다 살수율이 다르다. 광어는 50%, 대방어는 40%, 도미는 30%. 뼈와 내장을 제거하고 나면 절반 이상이 버려진다. 의사소통에도 살수율이 있다. 전문가라 해도 70% 정도, 일반인은 30~50%, 훈련받지 않으면 10~20%까지 하락한다.
이 수치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반 이상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의미는 표현 바깥으로 자꾸만 누수된다.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큐를 연결해 100%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결손될 수밖에 없다. 언어능력과 소통능력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근 친구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며 목격한 장면 : 한쪽이 별 의미 없이 건넨 호의가 다른 쪽에게는 애정의 징표로 읽혔다. 별 생각 없는 연락이 관계 발전의 신호로 해석됐다. 한쪽은 마음을 준 적이 없었고, 다른 쪽은 마음을 키워나갔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우리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라 프로젝터에 가깝다. 바깥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내면의 욕망과 기대를 현실에 투사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처럼, 우리는 각자 다른 규칙으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해의 풍경들이 일상을 채운다.
디지털 시대는 이런 오해를 증폭시킨다. 스마트폰의 차가운 유리면을 두드리는 손끝, 새벽 3시에 울리는 카톡 알림음의 불안감, 기계적인 타자음이 만들어내는 인공적 리듬들. 우리는 140자 안에 온 마음을 담으려 하지만, 압축된 언어는 오해의 가능성만 높인다. 메시지를 보내는 그 순간과 상대방이 읽는 순간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그 짧은 간극에서 맥락은 소멸하고, 의도는 왜곡된다.
마음은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 같아서 조금만 다쳐도 쉽게 닫혀버린다. 일단 마음이 꼬막처럼 꽉 닫히면 잘 열리지 않는다. 이때 건네는 모든 말들은 공허한 혼잣말, 닿지 않는 독백에 불과해진다.
가장 잔혹한 것은 선한 의도조차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배려하려던 마음이 간섭으로 읽히고, 격려하려던 말이 비아냥으로 들린다. 의도와 결과 사이에는 언제나 해석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해석은 수신자의 고유한 영역이다.
더 잔혹한 것은 시간이 지나며 기억 속에서 대화가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따뜻하게 들렸던 말이 회상 속에서는 차갑게 변하고, 무심코 던진 농담이 상처로 각인된다. 우리는 같은 대화를 서로 다르게 기억하며, 각자의 서사 속에서 상대방을 재구성한다.
데리다가 말한 '해체'의 논리처럼, 모든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독자 안에서 재탄생한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메시지는 서로 다른 생명체다. 전자는 내 머릿속에서 태어나지만, 후자는 상대방의 경험과 감정과 편견 속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하나의 섬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사유지에 방문하려면 방문증이, 출입하려면 출입증이, 이주하려면 이주증이 필요하다.
마음의 각도는 시시각각 굴절된다. 날씨, 기분, 컨디션에 따라 자아는 교체되고, 같은 말도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남자와 여자는 개와 고양이만큼 다르고, 같은 성별끼리도 각기 다른 인식 체계를 가진다. 언어와 겉모습으로 드러나는 정보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소통의 본질은 '이해'가 아니라 '오류'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해는 언제나 확신에서 파생된다. 그래도 될 거라는 확신, 친하니까 괜찮다는 확신, 너도 나와 같다는 확신. 하지만 인간은 오류하는 존재라는 진실을 자주 간과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통은 무엇인가? 요루를 쓰다듬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담아 쓰다듬어도 요루가 싫어한다면 그건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방식이 진짜 사랑이다.
진정한 소통은 내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그에 맞춰 반응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이 제시하는 이상적 담화 상황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 자체가 윤리적 실천이다.
상대방의 언어로 번역하는 노력, 그들의 세계로 건너가려는 시도, 그것이 소통의 윤리학이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이해하려는 마음은 가능하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자체가 인간다움의 증거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주둥이를 잘못 놀린 죄로 15년간 감금당한 후 스스로 혀를 뽑는다. 말로 먹고 사는 나 역시 매일 수많은 오해를 생산한다. 하지만 완벽한 소통을 추구하다 침묵에 빠지는 것은 또 다른 극단이다.
중요한 것은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류를 줄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오해는 관계의 본질이기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반복된다. 이 오해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관건이다. 오류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다리들이라도 계속 놓아가야 한다.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비대면 소통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화면 너머의 얼굴들, 지연되는 음성, 끊어지는 연결.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연결되려 애썼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소통의 방식은 다양해지지만, 소통의 본질적 어려움은 변하지 않는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정확한 소통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친구가 실연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나는 위로의 말들을 준비했지만, 그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 모든 언어는 무력해졌다. 그저 함께 있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은 어떤 말보다 웅변적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듯이, 어떤 경험들은 언어로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침묵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함께 있음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순간들을.
성시경의 노래처럼, "너를 보면서 하는 모든 말 사랑한단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 쉬운 인사말도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계속 말을 걸어보는 것.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주파수에서 방송하는 라디오 같은 존재들이다. 완벽한 수신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계속 신호를 보내고 받으려 한다. 때로는 잡음에 묻히고, 때로는 전파가 끊어지지만, 그 불완전한 시도들이 모여 관계라는 다리를 만든다.
오류의 강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강을 건너려는 인간의 의지 또한 마르지 않는다. 삶을 너무 많이 흘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 불완전한 다리들을 놓아가야 한다.
완벽한 소통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기루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 자체가, 우리가 여전히 인간임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