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Erratus
[Quiz]
지영이는 20살 대학생이고, 뮤지컬과 전시회 관람을 좋아한다.
인스타그램에는 예술 작품 사진이 많고, 유행과 패션에 민감하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클럽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음주와 가무를 즐긴다.
유튜브에는 인기 K-pop 댄스 챌린지를 올리고, 성격은 명랑하고 활발하다.
지영이는 예술대생일 확률이 높을까? 공대생일 확률이 높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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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예대생이라고 대답하겠지만,
교육부에서 제공하는 2024년 모집단위 별 입학 정원을 살펴 보면,
국내 4년제 대학에서 예술 계열은 약 150개,
공과대학은 약 300개 학과가 운영된다.
동일 기준 예술 계열 학과 총 입학 정원은 약 7,500명,
공과대학 총 입학 정원은 약 30,000명으로 집계된다.
공과대학 학과 수는 예술전공 학과 수의 약 2배이고,
공과대학 입학 정원은 예술전공 대비 약 4배에 해당된다.
즉, 확률로 따지면 공대생일 가능성이 명확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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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다지 납득하고 싶지가 않다.
공대생이 패션을 좋아할 리 없고, 음주와 가무를 즐길 리도 없으며,
명랑하고 활발한 인싸 재질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영이는 패션에 관심이 많지만, 코딩 공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주말에 종종 클럽에 가지만, 평소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훨씬 많을 수도 있다.
‘공대생은 노잼이고, 팩트에 집착하고, 체크 셔츠만 입고, 사교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
그리고 무엇보다 ‘공대생은 남자’라는 고정관념이 정확한 판단을 왜곡한다.
사실에 기반한 확률과 통계보다,
외형적 특징과 이미지가 훨씬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떴다 떴다 비행기]
한 가지 예시를 더 보자.
내 친구 서제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오랜 운전 경력으로 자동차와 한몸처럼 움직이며,
야간 운전도, 빗길 운전도 문제 없는 베테랑 운전자다.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도 곧잘 운전한다.
물론 안전벨트는
웬만하면 매지 않는다.
그런데 서제는 비행을 무서워한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얼굴은 사색이 되고, 몸은 덜덜 떨린다.
그런데 자동차와 비행기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위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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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자동차는 약 13억 대가 운행되고 있고,
상업용 항공기는 약 2만~2만5천 대 정도로 추정된다.
2024년 미국에서만 약 600만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청 NHTSA 통계)
2024년 전 세계 항공 사고는 46건이었다. (국제항공운송협회 IATA 보고서)
매년 전세계적으로 약 130만 명이 자동차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하루 평균 약 3,500명)
2024년 발생한 46건의 항공사고 중, 7건의 치명적인 사고로 24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자동차 운전자가 평생 동안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1/98, 약 1% 에 해당하고,
비행기 탑승자가 평생 동안 항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1/7,178, 약 0.01% 에 해당한다.
이처럼 비행기는 자동차보다
사고 발생 확률과 사고 발생 시 사망률이 현저히 낮다.
따라서 베스트 드라이버 서제는
비행기를 탈 때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Homo Erratus]
하지만 서제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보다는
휴리스틱(Heuristics), 편견(Biases), 오류(Errors), 직관(Intuition)을 기반으로 사고한다.
대표성 휴리스틱 (지영이 사례), 가용성 휴리스틱 (서제 사례), 고정점 휴리스틱 (Anchoring Heuristic), 시뮬레이션 휴리스틱 (Simulation Heuristic), 기본률 무시 (Base Rate Neglect),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 자기중심 편향 (Egocentric Bias), 후광 효과 (Halo Effect), 부정성 편향 (Negativity Bias), 손실 회피 편향 (Loss Aversion Bias), 과신 효과 (Overconfidence Effect), 생존자 편향 (Survivorship Bias), 도박사의 오류 (Gambler’s Fallacy), 합성의 오류 (Fallacy of Composition), 핫핸드 편향 (Hot-Hand Fallacy), 잘못된 인과관계 오류 (Post Hoc Fallacy), 흑백 논리 오류 (False Dichotomy), 밴드왜건 효과 (Bandwagon Effect), 속물 효과 (Snob Effect), 동조 효과 (Conformity Effect or Conformity Bias), 프레이밍 효과 (Framing Effect), 내집단 편향 (Ingroup Bias), 착각적 상관 (Illusory Correlation), 자기 이익 편향 (Self-Serving Bias), 매몰 비용 오류 (Sunk Cost Fallacy), 지식의 저주 (Curse of Knowledge), 계획 오류 (Planning Fallacy), 권위 편향 (Authority Bias), 사후 확신 편향 (Hindsight Bias), 자기회귀 편향 (Self-Recency Bias), 기본 귀인 오류 (Fundamental Attribution Error), 손쉬운 해결책 편향 (Solution Bias), 착한 사람 증후군 (Just-World Hypothesis), 집단사고 (Groupthink), 사회적 비교 편향 (Social Comparison Bias), 행동 편향 (Action Bias)…
이미 대중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편향만 이 정도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편향만 수백 개라고 확신한다.
호모 에러투스,
인간은 그야말로 ‘오류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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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업들은 정확히
이 지점을 맹수처럼 파고든다.
환경 조성, 공간 배치, 동선 설계, 가격 할인, 감각 활용 등
심리를 농락하는 마케팅은 셀 수 없이 많다.
소비자들은 기업들의 손바닥 위에 있고,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머리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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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템포 음악으로 매장에 더 오래 머물게 한다.
빠른 템포 음악으로 빨리 나가게끔 만든다.
입구에 신선 식품을 배치해 건강한 느낌을 강조한다.
가장 안쪽에 필수품을 배치해 충동 구매를 이끈다.
동선을 길게 설계해 더 많은 상품에 노출시키고,
계산대 근처에 간식을 배치해 추가 구매를 유도한다.
‘첫 달 무료’ 서비스는 ‘해지 지연 성향’을 이용한 전략이고,
"얼마 이상 무료 배송" 시스템은 상품 구매를 강제한다.
‘10,000원’ → ‘9,900원’ 처럼 자릿수 착시 효과를 활용하고,
‘50,000원’ → ‘19,900원’ (60% 할인!) 처럼 이득 심리를 건드린다.
향긋한 빵, 커피, 초콜릿 냄새를 퍼뜨려 본능 영역을 자극하고,
산뜻한 과일 향을 통해 신선한 이미지를 강화한다.
"오늘 하루만!", "선착순 100명 한정!", “1개 남음!”, "곧 품절 예정!" 같은
희소성 전략으로 손실회피 심리를 돋구고,
"유명 연예인이 선택한 제품!", "전문가들이 극찬한 상품", "베스트셀러 1위!" 처럼
사회적 증거를 활용해 동조 효과를 노린다.
이외에도 댓글 알바를 고용한 리뷰 조작으로
군중 심리를 악용하기도 하고,
검색기록 등 개인정보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광고로 타겟을 저격한다.
심지어 이런 전략들을 치밀하게 조합해
더욱 더 치명적인 효과를 실현한다.
소비자는 침입자의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논리적일 틈도 없이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자유의지라고 착각한 채,
구매 행동을 강제당한다.
통장은 당연히 텅장이 된다.
[해리포터와 세뇌의 방]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볼드모트는
해리와 연결된 정신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머릿속을 침범한다.
볼드모트의 레질리먼시(정신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
덤블도어는 해리에게 오클러먼시(정신 보호) 훈련을 받도록 요구하지만,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볼드모트에게 놀아난다.
해리는 마지막까지
거짓 정보에 속아 유린당하고,
이 치명적인 패착은 결국
시리우스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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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법 세계의 음모는
현대인의 일상을 은유한다.
현대인은 ‘거대 자본주의’ 라는 검은 조직에게
매일 ‘광고’ 라는 습격을 당한다. 아주 지속적이고 은밀하게.
대부분은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설령 어렴풋이 알더라도 속수무책으로 휘둘린다.
훈련되지 않은 정신은 너무나 취약하기에,
시리우스라는 영혼을 지키기엔 역부족이다.
[정신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이처럼 세상은 이미 세이렌과 키르케의 유혹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신화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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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이타카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우면서도 악명이 자자한 세이렌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싶지만,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돛대에 몸을 묶어 스스로 결박하고,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아 노이즈 캔슬링 상태를 만든다.
이윽고 배가 세이렌 근처를 지나갈 때,
매혹에 이끌린 오디세우스는 결박을 풀라며 소리 지르며 몸부림치지만,
부하들은 들을 수 없었고,
배는 세이렌의 섬을 무사히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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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는 다양한 교훈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짚고 싶다.
오디세우스는 세상이 칭송하는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리란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하고,
외부 도움을 통한 자구책을 마련한다.
본인의 나약함과 취약함을 인정하고,
기꺼이 주변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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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나처럼 범인에 불과한 유약한 인간은 어떠한 여지도 없다.
오디세우스처럼 확고하게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내가 ‘절대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
한평생 ‘의지 박약’, ‘절제력 부족’, ‘오류 덩어리’, 실수·허점투성이’,
‘불확실한 존재’ 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갑을 챙기면서, 돈은 쓰지 않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실패한다.
선반에 술을 채우고서, 마시지는 않겠다는 다짐은 반드시 무너진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서, 제 시간에 눈 뜨겠다는 마음은 지각만을 초래한다.
열정은 쓰레기다.
절제는 짧고 유혹은 강하다.
의지는 의도와 비례하지 않는다.
온전한 자유는 허상이다. 대부분 방종과 나태로 흘러간다.
나라는 오만한 인간이 능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겸손해야 한다.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환경을 설정해야 한다.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적절한 루틴과 규칙이 필요하다.
창조는 아이러니하게도
통제와 약속, 규율과 제어 속에 존재한다.
[여러분 제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아니하다’
이 문장은 보통
‘적을 아는 것’에 방점이 찍히지만,
이미 역설했듯 ‘나를 아는 것’,
즉, ‘자기 객관화’ 역시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이 유명한 손자병법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며’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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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전문가, 마케터, 과학자, 기업들은
결코 친구가 아니다.
그들이 접근하는 목적을 파악해야 한다.
그들이 구사하는 전략을 이해해야 한다.
모르면 당한다.
순진하면 잡아 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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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알아야 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당신은 재벌이 아니다.
우리는 마피아가 아니다.
유혹에 취약한
선량한 시민일 뿐이다.
[Extraction]
영화 ‘인셉션(Inception)’에서
코브(디카프리오 役)는 항상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유능한 꿈 침입자다.
그러나 피셔(킬리언 머피 役)의 꿈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교전이 일어난다.
피셔의 무의식은 인셉션에 대비해
각종 화기들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행 사이토(와타나베 켄 役)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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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로
이 지점을 지향해야 한다.
매일, 매순간, 일상 곳곳에서,
게릴라 전투가 벌어진다.
이토록 무수한 자극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정신이 산란되지 않고 버틸 사람은 없다.
정신을 훈련하고, 결핍을 보완해야 한다.
자원을 지키기 위해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심리학은 방어술이다.
지독한 세상에서
질기게 살아남기 위해서,
갈수록 교묘해지는 계략들을
알아차리고, 추출하고, 제거하고, 폐기해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
넛지에는 넛지로.
[참고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