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 우르스
어느 아침, 출근길에서 나는 한 마리 거대한 짐승과 조우했다.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 웅크린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갑판 위로 끌려 올라온 새처럼, 그 금속의 야수는 이 평범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람보르기니 우르스. 나중에 알게 된 그 이름은 라틴어로 '곰'이라는 뜻이었다. 이 곰은 도시라는 콘크리트 정글에서 길들여진, 욕망이 빚어낸 새로운 종족의 맹수였다. 그 몸값은 내가 거주하는 공간의 다섯 배를 넘어섰다. 숫자로만 존재하던 계급의 거리가 갑작스레 물질의 형태를 입고 내 앞에 현현한 순간이었다.
나는 문득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 앞에서 느꼈을 법한 현기증을 경험했다. 저것을 소유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은 자아의 파편들을 저당 잡혀야 할까. 이내 나는 이솝의 여우로 변신했다. "저런 차가 무슨 소용인가. 결국 이동수단일 뿐이지 않은가." 합리화라는 이름의 신포도를 따는 일은 생각보다 손쉬웠다.
하지만 그 달콤한 자기기만의 즙을 삼키는 순간, 나는 더 깊은 씁쓸함과 마주해야 했다. 왜냐하면 신포도 전략이 작동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욕망의 자장 안으로 포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이 비교하지 않는 마음에서 온다면, 불행은 필연적으로 비교하는 마음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비교를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상실'은 단순히 예술작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복제되고 순환되는 이 시공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소유를 통해 우리 자신의 결핍을 확인당한다.
SNS라는 이름의 거대한 패놉티콘 속에서 우리는 감시자이면서 동시에 피감시자다. 누군가의 여행지와 음식, 의복과 차량, 부동산과 투자수익까지. 원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정보들이 우리의 욕망을 은밀하게 조율한다. 라캉이 통찰한 대로,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비교 자체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문제는 비교 그 자체가 아니라, 비교의 방식과 태도에 있다. 질투와 시기로 점철된 비교와 성찰과 자각을 위한 비교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베블런이 '과시적 소비'라고 명명했던 그 충동은 이제 시스템 전체의 동력이 되었다. 마치 칼뱅이 예정설을 통해 구원의 징표를 세속적 성공에서 찾았듯이, 현대의 자본주의는 소유를 통한 구원을 약속한다.
돈이라는 신은 현세적이다. 그는 내세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쾌락을 담보로 신도들을 불러모은다. 그 신의 제단에는 끝없이 새로운 제물들이 바쳐진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 차이에 대한 갈증, 구별에 대한 욕망이 그 제물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소비는 단순히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불안에 대한 대응이자, 정체성 확인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르트르가 말한 '존재의 무(無)'를 메우려는 절망적 몸부림이 소비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의 사회학 역시 정교하게 작동한다. 상류층은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문화자본을 통해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하위층은 그들의 취향을 동경하며 모방하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양층은 동일한 욕망의 구조 안에 갇혀 있다. 다만 그 위치가 다를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적 주체의 근본적 상처가 발생한다. 그것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다. 왜냐하면 그 상처 자체가 시스템의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통찰한 '소외'는 이제 더 정교하고 은밀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을 관통한다.
현대의 도시는 벤야민이 말한 '산책자(플라뇌르)'에게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 그곳은 끝없는 자극과 차이의 공간이며,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고 소비하라고 명령하는 공간이다. 미니멀리즘이 일종의 저항 담론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하지만 그조차 때로는 또 다른 형태의 구별짓기로 전유되곤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소외의 양상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소외가 주로 노동과정에서의 소외였다면, 21세기의 소외는 소비과정에서의 소외로 나타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시장이 제공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맴돈다.
우리는 좋든 싫든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 거대한 매트릭스로부터 완전한 탈주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해와 성찰뿐이다.
따라서 시스템의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최소한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 아도르노가 말한 '부정변증법'의 실천이 여기서 절실하게 요청된다.
도구적 이성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지배구조를 창출했다. 그 지배는 더 이상 명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욕망의 언어로, 자유의 수사로, 개성의 담론으로 우리를 포획한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문제를 넘어서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기 때문이다.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각성의 시작이다.
중요한 것은 대안적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것이다. 완전한 탈출은 불가능할지라도, 부분적 저항은 가능하다. 소비의 속도를 늦추는 것, 진정한 필요와 인위적 욕구를 구분하는 것, 타인과의 경쟁보다는 자신과의 대화를 우선하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새로운 생활양식의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할 만큼 지혜로워지기 전까지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해는 단순한 인식론적 파악이 아니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지적 사랑(amor intellectualis)'의 차원이다. 우리가 처한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가능한 변화의 여지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것.
우선 정확한 시선이 필요하다. 대상을 미화하거나 악마화하지 않고, 그것의 본질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 자본주의를 무조건 비판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영향을 섬세하게 분석하는 태도.
나는 다시 그 거대한 금속 짐승을 떠올린다. 그것은 여전히 나에게 어떤 현기증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제 그 현기증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은 욕망의 현기증이면서 동시에 자유의 현기증이다. 어떤 욕망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현기증.
결국 중요한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욕망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맹목적 추종도 아니고 무조건적 거부도 아닌, 성찰적 거리두기를 통한 주체적 선택. 그 '어떻게'를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가, 아마도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희망의 근거다.
그리고 바로 그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가 아니라 욕망을 성찰하는 존재로서, 소비하는 동물이 아니라 삶을 창조하는 주체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