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9 발표
1.
나의 20대 초반 시절의 대부분 거점은
신촌 거리와 대학로였다 할 수 있다.
그냥 할일없이 거닐기만 해도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낭만과 자유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던 그때,
전공 서적이나 공부, 진로 따위에 연연하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좋았고
무리 속에 어울리는 것이 마냥 신났고
내 의지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두 뒷굽으로 또각또각 족적을 남기던 시기였다.
재수 없이 대학 입학이 92년이었으니,
제대로 4년 만에 졸업했더라면
96년 2월에 학교를 떠났을 테지만.
한 학기 휴학과 추가학점을 보충하며
97년 2월 졸업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 1년의 차이가 얼마나 큰 태풍으로 몰아부칠 줄은.
https://youtu.be/BqehkgJVkC4?si=61WOlLWt5wWX3E3B
2.
그때만 해도 한 학년에 400 명이 넘는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학과에서,
웬만한 남학생들은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하여
최저학점만 대충 유지해도
졸업 전 취직은 물론
웬만한 기업들에 바로바로 취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던 시기였다.
단과대학 내 소수의 여학생들 중
절반 이상은 외교관이나 코트라 자녀들이었고,
그들은 주로 외무/행정고시나 회계사를 준비했었다.
뒤엉킨 혼돈과 방황 그 자체였던 대학시절을 마감하며
좀더 공부하겠노라 뒤늦게 석사과정을 가기로 하고,
학과 사무실에 온 입사 원서 중
몇 회사와 금융기관에 보험용으로 원서를 함께 내었다.
당시 정해진 지원서 양식에 손글씨로 빽빽이 적어
증명사진을 붙인 서류를 들고
직접 찾아가서 공손히 제출해야 했던,
지금 생각해도 구시대적인 잔상으로 남아 있다.
96년 여름의 어느 날,
기말고사 때문에 초췌한 모습으로
머리 질끈 묶고 원서를 제출하러 갔던 모 은행.
접수받던 나이 지긋한 인사 담당자는
서류 제출도 인터뷰의 일부라며 대놓고 타박을 주었다.
당시 준비해 둔 영어 시험 점수도 없고,
당시 유행이었던 어학연수나 배낭여행,
교환학생의 경험도 없을뿐더러
그 흔한 운전면허증조차 없었고,
학점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지라,
내세울 것이 없이 초라한 스펙이지만
그렇다고 생각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을
마냥 한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3.
결과적으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고
학과 사무실 조교 자리를 얻어
학비 관련은 일차적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여자기숙사 사감 자리에 들어가게 되어
기본 숙식 문제가 해결되며
집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고 나서는
잠시 구직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는
어지간히 자유롭게 놀았던 것 같다.
그러다 97년 하반기 몰아닥친 IMF 사태의 해일로,
다른 선배, 동기들의 취업 실패, 채용 취소를 비롯해
여러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게 되었다.
이후 모두가 아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4.
코비드 시기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국, 서울.
이번에도 대학로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향했다.
변한 듯 아니 변한 듯한 거리 풍경에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옛날 기억들을 떠올리며
20대의 나와 비슷한 젊은이들 모습을
골목길 모서리 곳곳에서 마주치곤 했다.
몸은 이미 멀리 타국에 떨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좋은 기억이든 아프거나 괴로운 기억이든,
절절한 만남이든 이불킥할 실수였든,
내 젊음의 공간 위에 뭉뚱그린 추억이 되어
짧지 않은 인생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고
나만의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