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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언니와의 인연

2021/02/23 발표

by 고요한밤

1.

내 나름 길다고 하면 길고

길지 않다면 길지 않을 수 있는

나의 해외생활이 벌써 사반세기를 넘어간다.

그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스쳐가고 알아가고

교회, 아이 학교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많은 만남과 교류와 헤어짐의 순간들로 채워졌다.

물론 좋은 관계와 기억들만 남은 건 아니고

때론 잊고 싶고 부르르 떨게 하는

분노나 짜증, 아픔 등으로 남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나의 끝날이 이를 때까지 늘 잊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을 하도록 만든

몇몇의 고맙고 귀한 인연들이 존재한다.

‘신나는’ 언니는 그중의 한 분일 것이다.

Unforgettable..


2.

2010년 언니와의 역사적인 첫 만남 때부터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는 나보다 10살이 많았지만

그 나이 차가 무색할 만큼

늘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시고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당시 홍콩과 싱가폴, 각자 사는 곳도 다르고

비슷한 또래의 자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같은 대학교 출신의

하늘 같은 동문 선배님이었으나

언니는 음대 피아노 전공에, 나는 상경 쪽이었으니

특별히 대화의 공통된 주제가 없을 법도 했지만

이런저런 유쾌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금방 가까워졌다.

이듬해 봄 서울에서도 언니를 만나

예술의 전당도 가고. 그 앞 곤드레 밥집도 가고

이두헌 가수님의 와인바 ‘Pinot’에도 갔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여리여리해 보인다고만 생각했지

그토록 병으로 고생하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3.

2011년 여름,

그토록 원하시던 아들의 입시 결과가 나오고

진학할 학교가 정해지고 난 후

언니는 카페의 지인들께

담담히 본인 상태를 전하셨고

이후 2년 남짓의 시간을 조용히

신앙생활과 봉사에 전념하셨다.

어느 작은 교회에서 성가대장으로 섬기게 되면서

키보드 하나 달랑 들고 반주기 틀던 소규모에서

악보도 볼 줄 모르던 사람들이 화음을 만들고

찬양의 자리로 나아옴을 목도하며,

본인의 치유를 바라며 시작한 봉사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케 하는 은혜가 되었음에

한없이 감사한다 말씀하셨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삶의 80%를

이제 한없는 위안과 평안, 건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위해 그 도구로 살면서,

받은 은혜를 다시 나누는 80%가 되었다시며

이 세상 태어난 진정한 가치가

다 큰 아이들에게 매달리는 게 아님을 깨달으셨다고.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본인을 값지게 사용하여 주심에 감사하셨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 온 후에도

가끔씩 통화하며 안부 전할 때마다

반가워하시며 분주한 근황을 알려주셨다.


4.

2013년 4월,

언니가 떠나간 이후

몇 달 후 묘소에 들러 눈물을 찍어내던 내가

이제 언니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5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한 것도 아니지만

언니의 긍정적이고 밝고 단정했던 모습은

마음속 깊은 곳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

더불어 나는 나의 주변 지인들에게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반문하게 된다.

언제나 의연했던 언니,

본인의 여러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도

밝은 미소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던 그 모습대로

나도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닮아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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