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논으로 살아가기

-뜨거운 이마, 뾰족한 팔꿈치

by 시인 이문숙

우리는 투고된 <아논Anon>의 시를 모여 읽는다. 우리의 책상은 깨끗하다. 시를 사랑하고 열망하는 아논의 시를 읽는 우리의 이마는 뜨겁고 팔꿈치는 뾰족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아논은 누굴까? 우리는 아논을 이렇게 규정하기로 논의를 거듭한다.


아논은 A와 non의 합성어다. A는 흔히 어떤 말의 접두어로서 '무'이며 non은 '아닌 것'을 의미한다. '무'로 '무'를 뛰어넘기. '아닌 것'으로 '아닌 것'을 넘어서기, 부정의 부정의 거친, 험악한 재앙을 겪으며 마침내 솟아오르기.


좋은 시는 기존의 것을 그것이 구체적 일상이든 추상적 관념이든 '무'로 돌리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도달하는 첨예의 과정을 온몸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그때 '무'와 '아닌 것'의 자리에서 기이하게도 '새로움-새 움'이 태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아논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명의 목소리를 듣는 자이다. 오랜 갈증의, 폐허의, 벌레의, 사물의, 존재의 하얀 접시의, 물질의 어떤 목소리에 들어올려지며 열린 자이다.


아논은 또한 반복되면서도 균질화되고 매끈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 자이다. 아논의 식탁에 놓여있는 무정형의 하얀 본차이나 접시. 아논은 거기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바라본다. 그 균열이 만든 실금을 이용해 황새냉이나 흰미나리아재비 줄기를 그린다. 때로는 물고기의 헤링본 문양을 도안해낸다. 벌레들의 환상비행의 미세한 라인을 그려낸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시의 아논들. 오히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돌보지 않는 '무'와 '아닌 것'의 사소한 자리에서 창조성을 발견하는 아논들.


때로 그 표현이 미흡하고 미진하더라도, 폐허의 숲에서 나무에 활활 빛이 타는 흰 표식을 하면서 언어의 벌목을 감행하며 새 길을 여는 <trailblazer>들. 우리는 그런 진심어린 시들을 모여 읽어본다.


k의 시는 두 개의 상반된 문장을 끊임없이 충돌시키면서 신인류의 자기 탐닉적인 모습을 야민의 초상화를 통해 보여준다. 이때 야민은 화가 데이비드 야민이면서 동시에 산업화된 문물의 억압에서 벗어나, 원시의 야만성을 회복하려는 야민이기도 하다. 시 중반에서 '갈매기'는 창백한 힙스터의 중첩된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허니콤'의 완벽한 육각형의 구조 안에서 역설적으로 텅빈 신인류의 시체를 발굴하는 고고학적 시선이 흥미롭다.


s의 시는 쉽게 자기 푸념이나 자조, 자기가 만든 참사에 노출되는 위험을 안고 있지만, '뒤집을 때마다 시시각각 한번도 같은 방식으로 떨어지지 않는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과 같은 진술을 토대로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의 지극히 사적인 서사는 청춘의 불안한 민낯뿐만 아니라, 그 속의 내장까지 투시해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모호한 현재가 보여주지 않는 생경한 미래를 '피넬리케'로 표상할 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모조화석' 얼굴이 저절로 궁금하다.


o의 시는 시각의 극한을 보여준다. 적이기도 하고 때로 그렇지 않기도 한 상반된 관계의 섬망증이 붉고 하얀 이미지로 잘 묘사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미화에 그치지 않고, 양화대교와 같은 현실적 공간으로 이동할 때, 관계의 부재 속에서 혹은 붉은 눈의 충혈 속에서, 어느덧 입 속에 자라나고 있는 선인장으로 묘사된 말의 가시에 찔리는 경험을 하게 한다.


n의 시는 조용하고 응축적인 삶의 진저리를 '비누'를 매개체로 가만가만 그려낸다. 점진적으로 닳아가며 소멸해가는 소통 불능의 문제를 화장실이라는 내적 공간으로 환치하여 보여준다. 특히 첫 문장의 샴푸에 밑줄을 긋는다는 표현은 어떤 특별해지고 싶은 관계의 감성을 를 드러내며, 그 밑줄의 의미가 어떻게 더 심화될 것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닳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서로 알아버린 '시큼한 치부'로, 더 단단해질 것 같은 해맑은 예감.


그리고 다른 아논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묘한 열기에 휩싸인다. 가족이라는 시니피에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질식성애자'라고 표현하는 독특한 조어 능력, 우직하게 다성적인 언어로 한 편의 감각적 판화를 새겨나가는 '택호'의 묵직한 울림이 우리의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아논의 시를 읽는 우리의 이마는 점점 뜨거워진다. 팔꿈치는 더욱 철필처럼 날카로워진다. 앞으로 우리는 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많은 시들은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그 방향성을 미약하게 감지하고 있지만, 주제에 강박적으로 붙들려 시가 자체의 생장점을 만들며, 쓰여지면서 발아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충분히 유연하게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또한 파스칼 키냐르가 <성찰하다reflect>의 어원을 '아래로 수그리다'로 파악하고 그것을 철필로 내장에 깊이 새겨넣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할 때, 많은 아논들이 쉽게 저지르는 화자 우월적 시선이 시를 단편화하는 게 아닌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더 고개를 수그리고 대상에 흡착하고 골몰하길.


시에 드러나는 유머와 위트 또한 촉발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유희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아논은 미세하고 조밀한 감각, 정확한 인식, 시의 생장점을 알고 그것의 생육환경을 적확한 언어로 만들어 가는 자이다. 우리들의 아논은 그것이 묘사든 관념의 진술이든, 기존의 통념을 '무'와 '아닌 것'으로 바꾸어, 작고 사소하며 미흡한 한 점의 '새로움-새 움'이라도 세상에 틔워내려 한다. 누구의 허락없이 감히 그것을 세상에 무단투기해 보려 한다. 세상이여, 이렇게 골목골목 귀퉁이귀퉁이 틈새틈새 뿌려진 시의 세목들을 보아라. 우리의 지극한 아논들을 보아라.


마침내, 마침내가 마침내의 냇물로 콸콸 흘러내리듯,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아논이 특정한 시인의 이름이 아니고 익명의 어떤 존재들을 환기하는 <anonymous>, 바로 그 단어의 앞 글자만 따온 축약어 <anon>이라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고개를 더욱 수그리고 그 익명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대고 있지 않은가. 날카로운 철필의 목소리를 자신의 심장과 골수에 새겨넣고 있지 않는가.


* Paula Rego, The Dance,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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