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모두 여우다

-김혜순의 ‘백년 묵은 여우’를 읽고

by 시인 이문숙

여우가 어슬렁거린다. 사타구니에 꼬리를 슬쩍 감췄다 드러내기도 한다. 아주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연한 붓 놀림으로 뵈기도 하리라. 몸에 숙명처럼 붙어 있는 꼬리로 눈밭을 쓸어 남기는 시. 얼음의 하얀 결석이 꼬리에 쩍쩍 얼어붙기도 하리라. 얼어붙은 눈밭 위에 캑캑거리며 시를 토하는 여우들, 여우들.


3할은 알아듣게

아니 7할은 알아듣게 그렇게

말을 해가다가 어딘가

얼른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묶어두게

살짝이란 말 알지

........

뒤꼭지에도 눈이 있는 듯

귀뚜라미 수염같은

...........

그리고

절대 잊지 말 것

넌 지금 거울 앞에 있다는 인식

-김춘수의 ‘시인’

시인은 여우다. 말하려는 것을 다 말하지 않고 슬쩍 감추는 여우족이다. 슬쩍 감추는 것이 사실을 다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꾸역꾸역 낳으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우난골족’이다. 잘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다 뱉어 ‘거울’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시인들은 캑캑거릴 수밖에 없다. 슬쩍 꼬리를 감춰야 한다.

그렇게 보면 시 속의 ‘나’도 또 다른 여우다. 내가 이 생에서 얻으려는 것, 붉은 얼룩에서 붉은 아기, 복숭아로 겅중겅중 건너뛰며 가도가도 백지인 눈밭에 찍은 여우 발자국 같은 것. 그것은 그녀가 평생토록 투신해 써야 할 시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


시인은 살아 있는 ‘눈’에 마음껏 기침을 해야 하는데, 지금의 시인은 캑캑거린다. 지금의 다족류 현실은 그것을 허용하지도 않고, 작은 균열이 빽빽한 다면의 ‘거울’을 투시하고 있는 여우 따위도 없기 때문이다. 여우는 여우 목도리나 여우 방석으로 박제되어, 유령처럼 어슬렁거리다 슬쩍 꼬리를 내린다.

시 속의 ‘나’는 백년 묵은 여우, 어쩌면 백년의 현대시사詩史와 맞물리기도 한다. 당신이 한 모금 울컥 뱉어놓은 그 ‘붉은 얼룩’은 김수영의 ‘눈’처럼 펄펄 살아 있는 눈 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얼어붙은 골짜기의 세계에 은닉되어 있다. 화자인 나는 그 눈빛에 홀려 ‘붉은 얼룩’을 찾아 떠나지만, 내리는 눈은 나의 발자국을 싹싹 지워 탈각시켜 버린다.

그렇게 ‘붉은 얼룩’이 수액 출렁대는 복숭아로 퇴화되거나 진보하는 긴 여정 앞에는 ‘붉은 아기가 하얀 할머니 되고 하얀 할머니가 붉은 아기’가 되는 얼마나 길거나 박절한 시간이 필요한가.

싹싹 지워지는 발자국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발자국을 지우는 건 복사꽃처럼 난분분 날리는 섬멸적 눈이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는 시간이다. 거울의 왜곡과 편향이 깃들지 않는 현존하는 후미의 시간이다.

유령들의 병든 세계에 떨어진 그 붉은 얼룩을 받아 복숭아를 낳기 위해서는 땅 속의 뜨거운 고통을 치뤄야 한다는 걸 내파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거울’은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핏덩이가, 핏덩이의 엉덩이 두 쪽을 닮은 복숭아가 끈적거리고 물렁거리는 몸으로 얼룩을 안아내고 치유하는 ‘천도天桃’로 매달리기까지, 거울은 얼룩덜룩 세상의 오점과 비운동성, 언어적 나태를 인내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초기시 ‘도솔가’에서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 달라 빌어 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래죠”라고 죽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던 시인은 이제 꺼꾸로 복숭아를 얻으러 왔다고 한다. 꺼꾸로 ‘붉은 얼룩’을 숨긴 얼어붙은 골짜기를 녹여 수액 가득한 복숭아를 사산하려 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각오를 읽는다. 그래서 복숭아를 찾아 눈밭에 발자국을 찍으며 헤매는 여우는 ‘연필이 똑 부러져도’ 또 연필을 깎을 수밖에 없다. 이미 어디선가 건너오는 향기를 추출해 복숭아라는 도기에 담았으니, 이 병든 유령들이 어슬렁거리는 세계에서 핏발선 눈동자를 뜰 수밖에 없다. 겨울은 무엇보다 냉철하게 세계를 갈파해내는 거울거울일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겨울, 이 끝을 달려가는 시간은 흠결 가득한 거울일 수밖에 없다.


#김혜순시인#김춘수시인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Symphony in White No. 1 : The White Girl, 18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