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2003년이라 쓰고
현관을 나서는데 무언가 나를 붙잡았다. 붓펜 글씨로 쓴 아파트 공고문. 글씨는 홍학체나 공작체의 긴 꼬리를 가졌고 자로 그은 네모칸 속 날짜는 황금잉어체로 펄떡였다.
설 연휴 분리수거일
22일 없슴. 29일 실시
그런데 2023년이 아닌 2003년이라고 붓펜으로 썼다. 수정하지 않은 채 일주일이 다 가도록 게시판에 붙어있다. 주민들 누구도 다른 때와 달리 거기에 가위표를 치고 2023년이라고 수정하지 않고 있다. 한 자 한 글귀 그 붓펜 필체에 든 정성 때문일까.
그걸 보던 나는 2003년으로 가보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헉헉대고 올라간다. 박석고개다. 멀리 도적의 추행을 피하기 위해 누워 돌산이 되었다는 여자의 봉긋한 가슴이 보이면 오르막길은 끝난 것이다. 그곳에 통일로 4차선 대로에도 없던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등유집, 짜깁기집, 구멍가게, 연탄 쌀가게.
나의 종아리는 그 짜깁기집을 유독 사랑했다. 짜깁기집에는 색색가지 실패가 한 벽면에 가득했다. 유리창에는 오바로쿠, 마도매 같은 낯선 말들이 흰 페인트로 정성껏 써있었다. 더구나 마도매가 ‘마무리, 끝손질’이라는 걸 알고나선, 난 출근길을 연신내가 아닌 박석고개 그 가파른 오르막길로 흔쾌히 택했다.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박석고개, 짜깁기집에서, 아마 상호는 에덴이었던가. 이른 아침부터 재봉틀의 노루발이 움직인다. 코안장 돋보기가 반짝인다. 동쪽에서 드는 아침 햇빛을 더 잘 들이기 위해 간유리창 먼지를 닦기 위해 헌수건을 꼭 짜놓는 집. 햇빛을 긴급히 끌어다 꿈벅대는 형광등 대신 요긴하게 잘 쓰는 집.
각자 자기 자리에 존재했던 똑딱이 단추와 색색의 실. 아무도 침해받지 않는 이 시간의 고적. 이 고적을 홑뜨기하는 집.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아침이 저녁을 ‘마도매’하러 가는 듯한 고유한 때.
그 집의 옆구리에는 흑염소 우리가 있다. 흑염소를 매놓기 위해 줄을 둘둘 감아놓은 커단 돌멩이. 그 돌멩이에 박혀있던 석영에 갓 새로 뜬 햇빛이 들락날락댄다. 억센 가시풀 같은 거에 매달린 여린 잎사귀를 용케도 잘 골라 먹고 헉헉대는 나에게 안녕이라는 듯 ‘매애’하며 나를 불러세우던 ‘마도매’, 나의 사랑하는 마도매.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이제 박석고개 꼭대기다. 곧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이라고 헉헉 숨차지 않는 건 아니다. 수메르어로 마늘이 ‘숨sum’이라는데, 마늘이라고 숨이 차지 않는 건 아니다. 내리막길에선 마늘의 파란 싹이 내 종아리에서 돋아나는 기분이다. 마늘, 어서 가자. 급하게 내려가느라 마늘, 발 삐끗하지 말고.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연신내에서 내려 길 건너 연서시장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진양목욕탕에서 내려가면 되는 직장을 나는 그렇게 갔다. 박석고개에서 내려 그 짜깁기집에서 기르는 ‘마도매’라 별칭했던 흑염소 때문에.
박석고개 버스 정류장 주변에는 철물점이나 건자재상, 제재소 같은 가건물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보았던 ‘미송’이란 말과 ‘꽃사자삽’이란 말이 너무 좋았다.
그곳 톱밥의 살 냄새. 꽃사자삽의 반짝대는 날. 어떻게 한낱 흙삽에 ‘꽃사자’란 이름을 붙인 자 누구인가. 사나운 사자가 아닌 꽃처럼 부드럽게 으르렁거리는 삽.
퇴근길도 그곳으로 왔다. 서향의 빛이 짜깁기집을 달구면, 주인은 코안장 돋보기를 노루발 옆에 내려놓고 물 한 바께스를 받았다. 다림질 전 구겨진 옷에 뿜어내듯, 포장이 숭숭 망가진 길 위에 뿌린다. 그곳에 뽀얗게 일어났던 먼지들이 이글댔던 지열과 함께 가라앉는다. 길이 ‘마도매’로 반듯해진다.
오늘의 예보는 청명인데, 그 길 위로 ‘먼지잼’ 비가 내린다. 오늘도 마도매가 잘 되었다. 끝손질, 마무리가. 종아리에서 무엇보다 굵은 숨, 마늘이 자란다.
매양 헉헉대지만 나는 이 숨소리, 이 숨비소리. 종아리에서 마늘 새파랗게 자라는 소리가 좋아. 붉은 풍선을 들고 오르막길을 달려오르는 저 소년처럼 예쁜 종아리.
*가끔 태업하는 컴퓨터가 고맙다. 그래서 붓펜으로 2023년을 2003년으로 쓴 누군가가 고맙다. 그때의 마도매まとめ라는 낯선 말이 비록 수선집에서 사용하는 일본말이라도 나에겐 강렬하게 ‘잔존’한다.
* Albert Lamorisse, THE red balloon,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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