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꽈당 대신 깡총
새 해, 헌 해. 새날 아침, 헌 하루 아침. 검은 토끼, 흰 토끼 그러나 푸른 토끼. 올 토끼 해에는 제자리뛰기 그만하고 깡총 한 번 해 봤으면. 토끼 향로에 토끼가 되었으면.
새해맞이 피하려다 새달맞이한다. 달에서 깡총 뛰어나간 토끼. 디딜방아하다 지쳐 달아난 토끼는 향로에 가서 웅크린다. 향로를 지고 그 지칠 줄 모르고 하던 ‘깡총’을 잃고 쉰다. ‘고요한 무력’을 잘 빚어논 듯한 토끼.
베란다 밖에는 눈얼음 반질대는 산책로를 학생들이 뛰어간다. 일부러 미끄러지듯 꽈당꽈당 넘어진다. 소리를 꽤애꽥 지르며 폭죽을 터뜨린다. 그 괴성이 베란다 유리벽을 내리친다. 유리에 번개 문양이 새겨진다.
그 학생들 덕에 책상 위에는 덩달아 승냥이가 삵괭이가 돌아다닌다. 겁쟁이 토끼가 서랍 속으로 황급히 숨는다. 토낀다. 토끼라서 냅다 토낀다. 나는 가끔 책을 덮고 어슬렁거리는 그들을 응시한다.
여긴 생이라는 현장이다
이렇게 생생하므로 다른 곳일 수 없다
-조용미 ‘당분간’
당분간 야성의 이빨이 벌어진다. 으르렁댄다. 벌어진 이빨로 ‘생이라는 더할 수 없는 현장’의 푸들대는 살덩이를 물고 흔들어댄다. 이 이빨에 물려 죽어서도 쓸 수 있는 글을 궁리하는 책상을 번개가 번쩍 치고 간다.
그 번개가 든 나무를 태워 조제한 향이 있다. 그 각고의 향을 태우려는 토끼 향로가 있다. 여기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가 책상 위에.
둥근 우주 모양 뚜껑, 삼단 연화 항아리. 또 아래로 처진 한 단 연화 잎을 지고 있는 토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토끼 받침.
그 토끼를 본다. 단아하고 정갈하고 매끈한 토끼 귀. 눈코입 없는 동그마한 얼굴. 얼굴은 코도 없이 큼큼하다. 네 다리는 깡총을 잃고 있다. 조용히 두 무릎을 모은 토끼. 나는 그 토끼 얼굴에 내 얼굴을 조물조물 빚어 얹어본다. 어느덧 향로를 지고 있는 나.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조용미 ‘당분간’
삶의 미혹을 담은 주전자와 다를 바 없는 향로에 ‘번쩍이는 번개The Bolt of Lightning’라는 향수를 담아 본다. 어느덧 손등에 번개 문양이 새겨진다. 뜨겁고 펄펄하다.
새 해, 헌 해. 새 승냥이, 헌 승냥이. 새해맞이, 새달맞이. 초승에서 반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자정에. 금성과 목성이 달이 일직선으로 늘어서는 그 우주의 광기를 태울 향로 받침으로는 토끼가 제 격이 아니오? 사자도 해태도 들개도 승냥이도 아니지 않소. 그렇지 않소.
‘번쩍이는 번개The Bolt of Lightening’ 향수는 1온스 당 약 85만이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 노트Codex Leicester의 약 326억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액수다. 그만큼 조향하기 어려운 향을 갖고 있다 한다.
새해 첫날이라니 생활, 생도 활도 되지 않는다. 달 뜨는 밤엔 번개 맞으러 다니는 동호회의 어떤 사람처럼 번개를 채집하러 다니고 싶다. 이 채집된 번개를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에 담아 태우고 싶다. 아니 그 향로를 지고 있는 세 마리 토끼 중 하나가 되면 좋겠다. 깡총을 당분간 잃은 토끼. 미혹이라는 말을 버무려 눈코입을 지운 토끼.
무서운 집중 앞에 미망과 무명이 사나운 개의 이빨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를 바란다
통쾌하다 비명을 지를수록 생은 더욱 싱싱해지고, 생생해지고
-조용미 ‘당분간’
당분간 향로를 지고 있는 토끼 대신 내가 저 향로를 지고 있고 싶다. 내 얼굴을 다시 조물조물 빚어 저 토끼 얼굴에 내 얼굴을 얹고 싶다.
뒤돌아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 발을 잔뜩 모으고 깡총할 저 자세. 승냥이에게도 살쾡이에게도 번개에게도 지지 않는 자세. 무서운 집중으로 고요해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조용미 ‘당분간’
검은 토끼, 흰 토끼 그러나 푸른 토끼. 정작 흰 토끼는 세상에 없다 한다. 토끼는 혹한의 흰눈 덮인 산,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장색으로 ‘당분간’의 흰 토끼가 된다 한다. 없는 흰 토끼 대신 여기 향로에 깃들어 아름다운 미혹으로 지속되는 푸른 토끼.
당분간 새해라는 말을 써서 책상에 붙여논다. '새'의 'ㅣ'는 퍼드득 날아가고, 곧 '사'만 남을까봐 가만 토끼처럼 웅크린다. 깡총 안하고 못한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월이 오는 발짝 소리를 토끼처럼 쫑긋한 왼쪽 귀가 먼저 듣는다. ‘사’해의 소금이 버적거리며 토끼처럼 멈춘 발 앞에 놓여 있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삶이 사해처럼 번개처럼 순교자처럼, 저 토끼 향로처럼 다분히 ‘살금살금 전속력으로’ 오고 있다. 기기’묘묘卯卯’하게.
*Henri Matisse <I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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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leen Agar, Photograph of ‘Le Lapin’ rock in Ploumanach, July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