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자

-뒤지개가 뭐예요

by 시인 이문숙

가스불 켜놓고 나가서 안 돌아와요. 실종자 전단지에 이런 문구를 본 적 있다. 가스불 켜놓고 나갔으니 그집은 무사했을까.


가스불은 켤 줄 아나 끌 줄 몰라요. 가스불 켜는 법을 평생 몰라요. 밸브만 봐도 무서워요.


가스불이 무섭다니요. 그 작고 괴팍한 불꽃이 당신 손가락에 붙을까 그런가요. 손가락을 활활 태울까봐요.


안 무서워요. 이리 와봐요. 이렇게 해봐요. 나는 안 배워. 차라리 굶을래.


심지어 밥솥과 세탁기와 진공청소기가 다 무섭다는. 세기의 난쟁이들. 백색 가전만 보면 식은땀이 솟고 이석증이 온다. 다리에 쥐가 나며 협심이 생기고 관자놀이에 정맥이 튀어나온다. 이들 또한 불특정다수의 신인류.


압력밥솥 추가 달그락댄다. 세탁조가 빙빙 돈다. 청소기가 읽던 전단지를 빨아들인다. 가스불이 새파랗게 외계의 눈을 하고 쐐액색거린다.


키가 아주 작은 남자였다.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기름때에 절어 거무칙칙한 행주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정수기가 무서워 물을 못 떠마시고 과도가 무서우니 사과와 참외 앞에서 착한 개처럼 엎드려 있다.


마치 ‘신선하고 빨리 나오는 음식’이라는 메뉴가 있어서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것처럼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유리가 무서워 컵을 만지지 못하고 냉장고가 가끔 돌아가는 소리에 다발성경화가 온다. 기억 속 냉장고는 아주 높고 손 닿지 않는 조리대 위에 올려져 있다. 그건 아무리 ‘무명’ 식당이라도 특정인 담당이다.


그는 음료수는커녕 빈 컵조차 가지고 오지 않았다.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언제나 영업 중인 가스불과 냉장고와 행주와 도마들. 나는 키 작은 남자야. 저것들은 특정인의 물건들이기에 손을 댈 수 없어. 왜냐구. 그 물건들에 대한 왜소증을 평생 넘어서지 못했으니까.


저, 냉장고에 손이 닿지 않아요. 그러니까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내는 건 아내 담당이라는 거예요.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손 닿지 않는 냉장고는 가동 중이다. 냉동식품과 야채와 빵과 음료와 밀키트와 향신료와 조미간장들.


필요하지만 문을 열 줄 모른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특정인 담당이나 특정인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그의 아내가 쓰러져 있었다. 왼손에는 플라스틱 국자를 꼭 쥐고 있었다. 냉장고는 저 높은 곳, 찬장과 비슷한 높이에 매달려 있었다.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냉장고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그 효용을 잃은 시큰둥한 행주와 철수세미와 수레국화 무늬 포트메리온 접시들.


당신은 저 냉장고에 손이 닿을 거예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돈을 줄게요.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냉장고 열어주는 일만 해도 당신을 고용하겠다는 키 작은 남자는 어디선가 매일 본 듯하다. 특정인이 쓰러져있는 주방에 눈부신 가전과 집기들. 감자깎이칼과 주걱과 뒤지개 같은 것들.


저 빌어먹을 자식이 돈을 어딘가 숨겨놨을 거야.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그 키 작은 남자는 하루에도 수백 번 특정인을 호출하던 집주인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메뉴는 뭐요. 꽃새우아욱국은 어떠오. 입맛 없을 때 최고 아니오.


알았어요. 아욱을 다듬으려면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아욱 줄기를 벗기다 주방에서 쓰러져 누운 특정인은 그 키 작은 남자를 영구적으로 안일하게 잊어버린 듯하다.


왜 일어나지 않는 거요. 난 가스불을 쓸 줄 모르는 거. 냉장고 문을 못 여는 거 당신도 잘 알지 않소. 평생 난 돈을 벌었고요. 생활비를 생활비.


뭐야? 얼마나 들었어? 얼마나 들었냐고?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이 냉장고도 청소기도 싱크도 내가 다 들여놔주지 않았어요. 아일랜드 식탁도 전기오븐도요. 어서 일어나시오. 내가 가스불 켤 줄 모르는 거 아시지 않소.


어서 일어나 가스불을 켜고 냉장고를 여시오. 그럴 동안 내가 편지를 시를 읽어드리리다. 어서 일어나시오.


나무 뚜껑 안쪽면에는 어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르만’. 편지도 몇 통 있었다. ‘이르만, 내 사랑’. 그녀 서명이 들어간 시.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당신이 나를 위해 평생 가스불 끄지 않겠다는 거 잊지 않았지요. 냉장고에서 아욱이 자라고 꽃새우가 헤엄친다는 그 시 말이오. 그걸로 홍릉이던가 어느 왕릉 잔디밭 주부백일장에서 메달도 받아오고 잡지에도 실렸었던 그 시.


이 상자 속에 평생 내가 간직해왔던. 잊지 않았다면 어서 일어나시오. 어서요.


가루로 변한 박하사탕. 올해의 최고 시인에게 수여하는 플라스틱 메달-어느 사교클럽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특정인의 아욱 벗기던 손톱이 점점 검자줏빛이 된다. 이 특정인의 식당 카운터에는 냉장고가 너무 높은 곳에 있다. 그걸 열 수 없는 난쟁이 남자가 거의 울다시피 시를 읽고 있다.


저거 보라고. 아까 차라리 저길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뻔했잖아. ‘무한 리필 바비큐’ 간판 봤지?

-사만타 슈에블린 ‘이르만’


지나쳐와 들어갈 수 없는 무한리필 식당처럼 남자는 울부짖는다. 어서 일어나시오. 왜 넘어져 일어나지 않소. 난 ‘뒤지개’가 뭔지도 모르는 키 작은 남자라오.


* 사만타 슈에블린, 입 속의 새, 창비

* Giorgio Morandi, 에칭

#가사노동#가전제품#마술적리얼리즘#남미소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