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 죄의식, 저희의 죄
나는 검은색과 죄의 색 깜부기 들판과 도살장의 비명이 언덕에 가려진 페이지를 펼쳤다. 충치조차 아름다운 나이였다.
도살장과 활터를 오갔다. 그 너머 창살에 매달린 여자들이 바깥을 멍하니 내다보는 그 보호소를 보았다.
심심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내숭을 했지만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서는 안 되는 세 개의 장소. 도살장, 활터, 그 여자들의 육체가 마구 해진 채 나부끼던 이층 시멘트 바라크 건물.
우리는 그곳을 소나무가 불티처럼 많아 ‘솔티’라고 미화했다. 푸른솔이 푸른해솔이 좋아서 간다는 어린날의 부박한 가장놀이.
그 가장놀이가 끝나면 장광 속 숨겨둔 딱딱하게 굳은 설탕을 훔쳐 국자를 태웠다. 그 국자는 집에서 키우던 우리집 흰개 매리에게 들어올려져 어느 별자리의 캄캄한 배경이 되었다.
엄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양은그릇 장수가 오면 비루한 흰개를 주고 국자와 설탕과 바꿨다. 나는 국자에 다시 설탕을 태우며 흰개 매리를 잊었다. 큰곰자리가 된 매리는 앞발을 번쩍 들고 밤하늘에 있었다. 나는 곰이 된 그런 매리가 더 좋았다.
나는 녹색과 파란색 들판과 하늘과 풀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애브니 도시, 설탕을 태우다
그분은 우산이 없어 잠시 정자 아래서 비를 긋는 내게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노래는 평범을 비범으로 바꿨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치켜올렸다가 손은 묘한 선을 그리며 줄줄이 비의 빗금과 환상비행을 했다.
저 높은 산을 만드신 주 능력 찬양해
아름다운 하늘과 묘한 세상 주시고
내 이름은 매리梅里라오. 엄마는 나를 마리아를 보고 잉태했다오. 김마리아라고 할 수 없으니 김매리가 되었지. 엄마는 동정녀로 가장했지만 사실은 미혼모였다오.
내 이름 참 묘하지 않우. 매화 매 마을 리. 매화꽃 피는 마을. 엄마는 마을에 헐벗은 옷과 가난한 이부자리를 꿰매주는 그 매화마을의 침모. 나는 간난쟁이부터 바늘이 무섭지 않았어.
내 인생 가운데는 구불텅한 매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오. 고향에서 본 나무들하고 다르게 거칠었다. 여자 아이가 나무 아래에서 언제나 손에 바늘을 들고 있었다.
그림 가운데 몸통이 굵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푸네에서 본 나무들하고 다르게 매끈했다. 여자아이가 나무 아래에서 손에 주황색 공을 들고 있었다.
-애브니 도시, 설탕을 태우다
동네 아이들은 나를 매리 매리 부르며 놀렸다오. 매리매리 네 발로 기어봐. 그리고 짖어봐. 나는 끝까지 쫒아가서 그 애의 책상을 뒤엎었다오. 나는 아주 앙칼지고 지지 않는 아주 사나운 매리였지.
바늘을 사랑하는 매리는 간호부가 되어 내가 갔으나 가지 않은 척 가지 않은 그 장소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솔티의 그곳. 누구는 요양원이라고도 부르고 진료소라고 부르던 그곳에서 매리는 마리아였다. 윤금이라는 여자를 아시오. 둔기에 두개골이 부서지고 병이 그곳에 박힌.
매리는 강제로 압송되어온 그 ‘금이들’을 치료했다. 시간 맞춰 구토가 날 정도로 독한 항생제 주사를 주고 수면제를 먹였다. 나는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고 주사바늘로 그 기사를 찍고 긁어내고 지웠다오. 그리구 그 진료소를 나와 전도사가 되었다오. 종교는 있으시오.
여자아이가 들고 있는 공에 줄무늬가 있었다. 거기
한 줄 더 긋더라도 티가 안 날 것 같았다. 나는 연필을 공 한가운데에 찍고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애브니 도시, 설탕을 태우다
저도 그 장소를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어요. 창살에 매달린 그 여자들을 멀리서 본 날은 국자에 설탕을 태웠어요. 충치에 닿을 때마다 설탕은 커다란 통증을 유발했지요. 그 여자들의 고통을 지켜본 저희의 죄. 죄의 학교에서 저는 우등생이었지요.
나는 엄마 앞에서는 공부하는 척 책 귀퉁이마다 그 여자들의 눈을 그렸어요. 찌그러진 마름모꼴이 눈 속에 가득했어요. 그리구 지우구 다시 그리구. 그래도 마름모꼴은 반듯해지지 않았어요.
그런 나를 지켜보면서 엄마는 머리채를 당기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지도 않았다. 낙서를 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윗목에서 묵묵히 코바늘로 아후강을 떴다. 뜨개꽃이 방바닥에 쌓였다. 꽃 하나에 10원, 20원, 200원. 밤의 부업, 그것으로 또 설탕을 사서 숨겼다.
머리채가 당겨지고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나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마리아 테레사 수녀의 얼굴이 보였다. 낙서를 지우라고 했더니 뭐하는 거야?
-애브니 도시, 설탕을 태우다
그 ‘금이들’의 진료소 초입에는 활터가 있었다. 경성구락부 같은 소권력자들의 여흥이 그곳에 동시에 존재했다. 활터 주변에는 가지 마라. 잘못 쏜 화살이 너를 뚫을 수도 있어. 엄마는 지나가는 듯 내게 주의를 했다.
나는 엄마의 침묵 앞에 지우개질을 시작했지만, 마름모꼴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우개질을 멈추고 손을 모았다. 이 손을 멈추게 해 주세요. 허공에서 내려온 손이 코바늘로 내 손등을 찍었다. 설탕 또 네가 태웠지. 국자가 또 망가졌다. 어디선가 소리 하나가 내려왔다.
나는 지우개질을 시작했지만, 선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지우개질을 멈추고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아 테레사 수녀가 몸을 숙여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느닷없이 연필로 내 손등을 찍었다.
-애브니 도시, 설탕을 태우다
매리는 전도사가 되어 처음 만난 나에게 노래를 한다. 그 진료소의 간호부였던 매리는 노래를 한다. 이것이 내 죄이오. 묘한 세상 찬란하고 아름다운 태양의 죄요. 부드러운 달의 죄오.
나는 느려서 솔티의 도살장에서 실려나오는 살덩어리들과 피 냄새는 쉽게 나를 쫓아온다. 나를 휘덮는다. 나의 죄의 학교에서는 어떤 살해의 장소에 대해 단 한 줄 언급하지 않았다.
나의 흰개 매리가 사라지는 날 부뚜막에는 반짝이는 국자가 있었다. 어디 먼 곳에서 설탕 타는 단내가 훅 끼쳐왔다.
그곳 여자들은 울지 않았다. 소권력자들의 화살이 도살장의 하늘을 확 찢었다. 검은색 깜부기가 익었다. 내 입술에는 그 죄의 가루가 수염처럼 돋아났다. 어두워지는 하늘에는 우리집 흰개 매리가 올라가 국자 모양의 흰 별로 컹컹 짖었다.
내가 느려서 못 따라오면 마리아 테레사 수녀는 손톱으로 내 살을, 매번 다른 곳을 찾아서 꼬집었다. 나는 ‘죄악’ 같은 단어를 배웠다.
-애브니 도시, 설탕을 태우다
얼마전 아는 시인이 동두천 ‘금이들’의 흔적을 찾아본 적 있다고 했다. 그곳에 한 번 같이 가보면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내게 ‘죄악’ 같은 단어를 아말감으로 시커멓게 때워버린 충치처럼 선물해줬던 그 여자들의 장소.
매화꽃 피는 마을, 매리라는 그분을 신의 종으로 만든 그 아픈 처소.
나는 애룡저수지가 있는 그곳, 여자들의 장소를 같이 가을에는 한 번 가보자고 했다. 내가 가본 바 없는 선유리에 대해 말했다. 선유仙遊. 왜 ‘금이들’의 장소에는 이런 경이로운 지명이 붙는가. 왜 아말감처럼 떨어지지 않는가.
내가 목격했던 여자들의 진료소가 있던 ‘솔티’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로이 릭텐스타인ROY LICHTENSTEIN, 행복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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