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멘 오 루멘
빛이 서름서름 1월 6일 ‘디아 데 레이dia de reyes’를 지나간다. 빈 구유에는 아기 인형이 누워 있다. 우리 안의 동방박사는 빛을 오직 그 빛만을 따라 여기 도착했다. 우리는 그 ‘경배’를 그칠 줄 모른다.
1월 6일 미세먼지 나쁨 외출자제. 1월 9일 새벽 1시 28분 강화도 인근 해역 진도 4.0 지진 발생. 1월 9일 12:20~1:20분 인공위성 잔해 추락 위험 외출 주의.
1월 6일은 1월 9일을 알고 있었을까. 1월 9일은 1월 7일과 8일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침대가 기우뚱하는 그 새벽 1시 28분의 서울과 파주와 루멘이라는 책방을. 28분 서가에서 잠시 몇 권의 책들이 기우뚱했을 이 순간들을.
감홍이라는 사과가 우박을 맞고 당도를 높이는 것처럼. 사과의 다산을 위해 사과나무를 옆으로 자라게 전지하는 것처럼. 그 야트막한 아래를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개종된 말 과하마처럼.
그 어느날 서름서름하게 내 안의 동방박사를 따라 내가 다니는 성소의 책방 '루멘' 개장 기념 행사에 갔었다.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부스러뜨린다 하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한강 ‘희랍어 시간’
‘채식주의자'를 읽고 토론을 하는 지도 모르고. 나는 토론 전 그들이 나누던 사적인 대화를 듣다가, 행사가 시작되기 전, 조용히 빠져 나왔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루멘이라는 말이 내 눈을 어둡게 덮어서일까.
맨홀 주의. 발빠짐주의. 낙상 주의 이런 표지판에 기꺼이 순응하는 어둠의 딸처럼 걸어나왔다.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한강 ‘희랍어 시간’
책의 식물적 상상력이 1부 채식주의자의 채식, 2부 몽고반점의 꽃, 3부 나무 불꽃의 나무처럼 이미 문학이 다룬 익숙한 이미지의 미라적 환생과도 같았다.
육식은 폭력적이고 채식과 꽃, 나무는 아니라는 도식적이고 남루한 이분론적 사고와 장치에 나는 왜 이렇게 곡진하게 반발하는 것일까.
이 성마르고 협소한 ‘이접the disjunctive synthesis’에서 내 안의 파괴를 모르는 속성은 감홍이라는 사과처럼 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일까.
희랍어는 사어화되면서 구어로서의 가치를 잃으면서 더 수줍고 수런거리고 ‘수동적인 공격성’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희랍어는 고대의 언어가 되면서 그 의미는 고착을 모른다고 했다. 다성어로서 중의적 언어로서 파동.
이를테면 희랍어로 칼레 파 타 칼라
Χαλεπά Τά Καλά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한강 ‘희랍어 시간’
이 아름다움에 대한 세 가지 분절되지 않은 해석처럼 여성의 유비로서 가부장제의 희생물로서 꽃과 나무가 다른 벌레, 새, 인간 등에게 더 폭력으로 다가올 순간은 없는가.
미세먼지 나쁨을 알면서 외부로 뛰쳐나가는 천식환자처럼 나는 언어의 통증으로 콜록거렸다. 개업하는 언어 상점 앞에서 끊임없이 상체를 접었다 펴는 바람인형처럼 나는 루멘을 걸어나왔다.
여성도 남성도 야채도 인공눈물도 동물도 새도 꽃도 나무도 하늬바람도 호수도 의식도 무의식도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며 자기도 모르는 새 폭력과 위해를 저지르는 건 아닌가.
채식주의자의 영혜 남편의 위악적 모습은 남자 독자들 눈에는 어떻게 투영될까. 가부장제의 폭력 아래 연극이나 유령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여성, 영혜 언니 인혜의 진술에 기반한 이 소설보다 나는 한강의 '희랍어 시간'이 더 좋았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고 농밀한 그러나 격렬하고 적극적인 '희미해져감'이 좋아서. 그 수줍은 이기주의가 좋아서. 그 지진과 내파가 존귀하고 갈파하기 어렵고 아름다워서.
그때 내가 느낀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한강 ‘희랍어 시간’
2부 몽고반점은 영혜의 생명적 근원을 이해하려 했던 형부의 시선이 지나치게 강화되어 있고 과도한 성적 이미지의 남발이 한강의 조밀하며 절제된 기존의 문체와 달라서 나는 나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희랍어로 루멘은 루카스
Λουκάς
빛이다
색채이다
루멘은
어둠의 개종자다
그림자의 언니다.
영혜다 인혜다
흑사병이다
이 병을 물리치기 위해 *성모를 그린
최초의 화가다
색채다
1월 6일 미세먼지 나쁨을 뚫고 온
동방박사다
2월 2일 성촉일the holiday of candlemas로 가는
빛다발이다
1월 9일 암흑을 건너온
인공위성 잔해다
이교도 ‘루카’이다
마지막으로 표지화로 쓰인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 중 두 그루를 본다. 깡마르고 바삭하고 성긴 나무와 반짝대고 색채 풍성한 나무. 이 섣부른 대치와 의도성에 경악한다. 채식주의자 영혜는 이 나무들 중에 어떤 나무인가. 어떤 나무의 속성을 일러바치는가.
물론 두 그루는 뒷표지에 배치되어 있다. 네 그루 나무의 앞 표지 뒷 표지로의 절개가 네 그루 나무의 다양성이 어우러진 에곤 실레의 그림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 같았다.
헐벗든 여위든 풍성하든 애잔하든 네 그루 나무 다 각자 아름답지 않는가. ‘아름답고 어렵고 고결하지’ 않는가. 갑자기 그림은 이렇게 반절로 나누어 써도 된다고 허락받고 쓰는지 의아했다. 에곤 실레의 그림과 다르게 색감도 칙칙하고 암울하였다.
희랍어 수난을 겪다
배워 깨닫다
-한강 ‘희랍어 시간’
맞다. 수난과 깨달음은 비스름한 말이면서 서로 다른 빛의 낙차를 가진 말이다. 어둡고 그림자의 직소폭포를 거느렸고 까끌대고 동쪽의 빛나는 피요르드 같고 서안의 달 어금니 월아천 같고 일몰의 우는 모래 명사의 언덕 같고.
동녀국이라는 나라에는 여성이 젖가슴을 드러낸 전사들로 나온다. 전쟁과 정무와 제의를 담당하는 여자들. 단순히 수유하고 생명을 양육하는 생물학적 기관으로서 여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워 깨닫는’ 여자들이 루멘으로부터 빠져나온다.
루멘은 희랍어로 빛이다 루멘은 희랍어 어둠 에레보스erebus와 교합하여 낮을 만들었고 밝고 높은 대기를 만들었다.
빛, 어둠, 암흑, 선, 악, 여성, 남성의 혼재. 희랍어는 이 혼재의 미묘한 시간을 해쓱하고 그러나 위용있게 내어준다.
1월 6일 ‘디아 데 레이’의 날, 말 구유에 아기 인형은 라스콘이라는 빵 속에도 들어있고 이 빵을 나눠먹다 감춰진 아기를 발견한 자는 2월 2일 옥수수 잎사귀로 싼 빛의 만두를 빚어야 한다. 책방 루멘처럼 잔치를 벌여야 한다. 공여하고 노고를 다해야 한다. 베풂의 수난을 겪어야 한다.
미세먼지라도 발등에 끼얹으며 냉해를 입은 감홍이라는 ‘아름답고 어렵고 고결한’ 이름의 사과처럼 그 수천 알 사과를 걸망에 지고 나르는 작고 탄탄한 과하마처럼
아니 인공위성의 잔해에라도 머리를 맞고 정신 번쩍 차려야겠다. 희랍어 동사로 ‘배워 깨닫는’ 그 어떤 자가 되어야겠다.
오늘 새벽 1시 28분 책방 루멘에 책들이 조금 흔들렸다.
*루카는 이교도 의사로서, 복음과 사도행전을 쓰고 흑사병을 물리치기 위해 최초의 성모화를 그린다. 이 그림은 폴란드 체스트호바 ‘야스나고라 수도원’에 있다 한다.
* Egon Schiele, four 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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