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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이문숙 Sep 18. 2017

부재와 부채

-황전의 '사생진금도'

새 깃털이나 빗기며 구월 오후를 보낸다. 천 년 전, 황전의 '사생진금도.'

새는 새의 깃털을 가졌음을 오래 전 그때에도 부인하지 못하겠구나. 섬섬옥수 가늘고 윤나는 털. 새는 계절이 바뀌어도, 옷을 갈아입지 못한다.

구월이 선뜩하여, 부채를 다시 여름 설합 속에 넣으려니, 가을 부채로 반딧불이나 내리치는 여름의 심정을 조금은 알겠구나. 이미 거기 착착 귀를 맞춰 개어둔 여름이 있더구나.

구월 잠자리채도 가을 부채와 같구나. 텅 빈 잠자리채를 휘둘러대는 아이가 안쓰러워 여자는 '잠자리들이 집에 갔거나, 학원에 갔나봐.'라고 짐짓 말한다.

아이는 여전히 잠자리채를 휘둘러대며, 암팡지게 대꾸한다. '잠자리들은 학원 안 가.'

가을이 오니 빛이 바래는 사물들. 부채, 아이의 헛손짓을 포획하고 있는 잠자리채. 딸이 엄마 위해 사준다는 인견 브래지어 같은 것들.

구월이 왔으나 어디갔는지, 잡혀주지 않는 잠자리들. 그 능란한 계절의 속임수. 그렇다면 잠자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부재와 부채. 여름 속의 구월. 구월의 부채 같은 심정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거.

구월이 새 깃털처럼 와서 능란한 사기꾼처럼 가버릴까 두려워. 우리는 천 년 전 새 그림이, 구월이 목에 두른 가짜실크 스카프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천 년 전에도 똑같이 왔을 구월의 발 소리를 엿듣고 있는 자. 공원 벤치에 앉아, 잠자리채를 휘두르는 아이의 헛손짓을 지켜보는 저저저저 저 여자의 도무지 가늠하지 못하는.


잠자리들은 아이의 손이 닿지 않은 허공에서 '휑휑' 돌고 있다. 휑휑휑휑.

 깃털 속에서 손가락이 끌고 나오는 미미한 온기처럼, 구월의 이마를 노르스름하게 구우며 오후의 겉늙은 볕이 지나간다.


#황전사생진금도#9월#부채#새#천년#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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