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Y교수와의
새가 말줄임표처럼 운다. 점 세 개의 말줄임표.
기쁨이 '깁붐'이고 아픔이 '압홈'일 때, 나는 산길을 걸어오며 이런 새 소리를 듣는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핑하고 떨리는 어떤 순간, 어느새 흔적없이 밝은 깃털 하나를 떨구고 간 새는 점 세 개의 말줄임표를 두고 날아가 버린다.
그 자리에 패인 소리의 휑덩그러한 연못. 아직 비루한 나무들이 머리채를 담그고 있는 연못.
기쁨이 그저 기쁨이 아니고 '깁붐'일 때, 아픔이 그저 아픔이 아니고 '압홈'일 때.
최승자식 유머로 풀어보면 존재의 딸꾹질로 산은 아직 야위어 있다. 그 삐죽하게 솟은 광대뼈의 언덕 위에서 보는, 아직은 스물거리기기만 하지 무언가 확정되지 않은 봄 풍경은 그저 '파르르한 혼돈'이다.
연못 위로 이름 모를 나무가 물 속에 집을 짓고 들어간다. 풍경은 에드바르 뭉크의 사춘기 소녀처럼 야위고 버즘이 피었는데, 그 사이에서 새는 존재의 딸꾹질처럼 운다. 말줄임표처럼 뜨문뜨문거린다. 그럴 때 새는 어김없이 새가 아니라 '사이'이다. 새는 어느덧 '사이'라는 말로 가지를 벌린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eline은 'Y교수와의 대담'에서 이 '깁붐과 압홈' 사이에 '감성적인 철로'를 놓는다. 가늘고 샛된 비올롱 같은 철로. 마주오는 열차를 피해 잠시 피해 있는 철로. 열차의 충돌을 막아주고 열차의 연착을 대비해 기다려주는 예비 철로.
루리 페르디낭 셀린은 이 지하철에는 더러운 '실리적인 수렁', 급전을 하러 가는 밥벌이의 '설홈'도, 몽롱의 길을 훼방하고 막아서는 교차로도 황색 신호등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맘껏 '문체'를 펼칠 수 있으며 직통으로 전속력으로 탈선할 수 있는 '예측불허의 침목'이 있다고 쓴다. 나의 말줄임표라는 점 세 개의 침목.
Y교수는 이 새 소리의 '사이'를 듣고 있다. 이 '사이'의 새 소리를 연못 가장 채광 좋은 서재에 넣어둔다. 맘껏 문체를 펼친 빛바랜 종이를 물결의 서랍에 넣어둔다.
넘어오는 산 언덕에 물 고인 연못에 솟는 눈꽃소복나무. 아직 발화하지 않은 새 소리의 '사이'를 떠억 버티고 있는 눈꽃소복.
이제 깁붐은 혼자 길을 걸을 때 배시시 입가의 연못에 솟는 살랑살랑 바람 '붐'이고 압홈은 그 연못의 물결, 상처의 맑게 패인 '홈'이다.
나뭇가지가 핑하고 운다. 점 세 개의 말줄임표가 상처의 '맑은 홈'처럼 허공에 패인다. 새가 너와 나 사이로 날아간다. 거기 침목이 침묵처럼 놓인다.
너와 나 사이 감성적인 철로가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