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링크만의 '빨랫줄 위의 비애'
H의 흑발이 배배 꼬인 긴 ‘검은 스타킹' 같다. 그녀를 흘스치듯 만나고 난 뒤, 이전에 읽었던 독일 시가 다시 궁금해졌다.
책장을 뒤져, 고려원에서 1995년 발행한 롤프 디터 브링크만의 '빨랫줄 위의 비애'를 찾아 읽는다.
두 그루의 헐벗은 나무 사이에
검정색 스타킹 하나가
그 꼬인
긴 다리에서 물이
그 밝고, 이른 햇살 속에서
돌 위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빨랫줄의 비애'에서
검은 비애가 방울방울 떨어진 돌의 이마에 검은 마스카라 같은 빛이 번져간다. 그 빛이 어둠으로 탕진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행상하며'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인가.
상업적인 빛들이 흩뿌리는 밤을 보부상처럼 지고 가다, 그 빛을 흡수하는 시가지의 여자들이 모두 검은 스타킹을 신고 서 있는 착란에 빠진다.
눈부신 조명 아래, 그 빛들을 빨아들이는 무희의 검은 마스카라처럼, 사막 모래의 눈부심을 막는 미어캣의 눈 아래 검은 테두리처럼, 빨랫줄 위의 '꼬인' 검은 스타킹처럼,
오랜만에 밀폐용기 같은 12월 마지막 밤을 빠져나온다. 빨래줄에서 검은색 스타킹이 방출한 어떤 ‘방울방울’로. 돌 위에 빛얼룩을 만드는 그 밝은 비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