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세단기는 사지 마
노량진이다. 친구 은희가 친구를 위해 차려준, 내 인생 최초로 먹어본 안심스테이크.
오규원 선생님이 불쑥 생각난다. 드라마센터가 있던 언덕길, 명동 프린스호텔이었던가. 서울 예전 학생이었던 당시 이원 시인은 ‘가르숑’ 복장을 하고 시인의 낡은 가방을 들고 늘 같이 내려왔다. 제자들과 말 한차례 섞지 않는, 까칠하신 선생님이 제자와 처음으로 나누신 만찬. 선생님은 피가 줄줄 흐르던 스테이크를 드셨다.
고기를 먹을 줄 모르던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기만 했다. 그때 느꼈던 이질감. '창백한 지식인'의 초상 같은 것. 첫서리 내린 벌판에 혼자 우뚝 서 갈가마귀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구운 양파와 감자를 깨작이다 드디어 한 입 깨어문 스테이크가 이런 것이었구나. 고기가 사르르 입 속에서 녹는다는 말을 이해 못했는데.
이곳이 '영혼의 개구리 식당' 같다. 늘 정신의 빈혈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마련한 이 음식. 벌써 피톨들이 혈관을 뛰어다니네.
나는 은희를 위한 두 편의 시를 썼다. '청계천 새물맞이'와 '블루 라이트'를.
나는 직접 말하지 못했는데, 시집을 읽은 건너건너 은희의 친구가 '아무래도 이건 은희 너를 위해 쓴 거'라고 했단다. 나는 암말 않했지만, 맞아, 은희야.
옛날 편지와 공책을 그냥 내다버리면 누가 볼까 손으로 갈가리 찢다, 결국 손아귀뼈가 아파 세단기를 샀다는 은희야, 그렇게 파쇄하지 말구 나를 주지. 은행 명세표를 찢을 때나 봤던 세단기야, 이런 편지나 공책은 잘 감지해서 삼켰다가 다시 토해내 나에게로 보내주면 좋겠다!
언젠가 낙산 성곽길을 걸으며 은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 다 파쇄하며 얼마나 콧물 꿀적댔었는지, '내 몸은 콧물로 이뤄졌나봐.' 나는 눈물을 콧물로 대체해서 말할 줄 아는 은희의 이런 발화 방식에 매혹을 느낀다. 말에 약간의 더께를 얹어 오용하는 방식.
너는 이 말을 기억이라도 하니. 성곽은 돌로 이루어지고, 우리들의 창백한 어린 날은 '소리없이' 꿀적대던 콧물로 이루어졌지.
온갖 나무들이 그날의 편지들과 스프링 공책을 북북 찢어 던진다. 그 날의 잎들이 발 밑에서 부서지며 와삭와삭 굴러다닌다.
11월 모든 나무들은 세단기 같다. 풍력 발동기를 어깨에 지고 남자들이 발기발기 찢어낸 그 잎들을 한곳으로 쓸어내고 자루에 담는다. 고막이 터질 것 같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싸리비 한 자루 놓아둔다.
*가브리엘 뮌터 '슈타펠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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