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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일엔 이가체프 Mar 01. 2016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며칠 전의 일이다. 아빠, 엄마와 함께 집앞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공원을 돌고 있던 중에 저 앞 벤치에 누군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니 낯익은 할아버지가 보인다.



 얼마 전 아빠는 다리 수술을 받았다. 몇 차례 반복된 재수술인 데다 위험하고 어려운 수술이었고, 수술 후 한동안은 휠체어를 타셔야 했다. 그리고 그 한동안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긴 시간이 되고 있었다. 아빠를 간호하시던 엄마는 하루에 한 번씩 휠체어를 밀고 아빠와 산책을 나갔다. 두 분이 매일 정해 둔 시간에 산책을 나가면 항상 만나는 노부부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산책하며 매일 같이 만나는 두 분과 소소한 안부를 건네는 사이가 되었고, 이따금씩 그분들의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시곤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알게 됐다.


 가끔 나도 함께 산책을 나설 때면 두 분을 볼 수 있었는데 늘 먼저 나와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그러면 우리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백발의 노부부는 항상 같은 시간, 같은 벤치에 앉아 계시곤 했다. 마치 그곳에 있어야 하는 풍경처럼, 계절이 지나도 두 분은 한결 같은 자리에서 한결 같은 모습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거들고 산책하는 할아버지의 걸음은 바쁠 것 없다는 듯 여유로웠다. 바로 옆동에 아들네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이 코닿을 거리에 두 분이 계실 집을 마련해드려 따로 살고 계신다고 했다. 편찮으신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가 식사를 준비하고 언제나 꼭 붙어서 서로를 챙기시는 모습에, 엄마는 저 연세에도 저렇게 정정하게 함께 하는 모습이 얼마나 좋으냐며 웃곤 하셨다.



 이날도 여전히 반갑게 손 흔드는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할아버지 혼자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는 아빠 손을 꼭 붙들고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하셨다. 그러고보니 우리의 산책시간이 바뀐 탓일지 한동안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는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엄마는 할머니는 어디 가시고 혼자 나오셨냐고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 가셨어. 한 달쯤 됐어."


 멀리서 할아버지 곁의 빈 자리가 보였을 때, 어쩌면 이미 직감했는지 모른다.


 놀란 엄마와 아빠는 어쩌다 그러셨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셨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나는 전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의 부모님, 동료의 부모님의 부고를 전해 받는 일이 생겼고, 조의를 전할 일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건네는 말을 찾는 것이 나는 어려웠다. 어떤 말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려워 그저 말없이 손을 꼭 붙들고 같이 눈물 흘릴 때가 많았다. 인생의 산을 오르며 나보다 더 많은 고개들을 넘었을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들은 죽음을 두고 위로와 아픔을 나누는 데 서툴지 않은 듯 의연해 보였다.


 망연히 할 말을 찾는 나에게 오히려 허허 웃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담담한 모습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고, 괜찮다고 도리어 나를 달래는 것 같아 괜히 눈물이 그렁거렸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걸음을 돌렸을 때, 멀리 벤치에 홀로 앉은 할아버지가 보였다. 아직은 차가운 겨울 공기 사이로 봄을 준비하는 한낮의 볕이 그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할머니의 빈 자리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이내 벤치에서 일어난 할아버지는 집으로 들어가시다가 우리를 보고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잘 들어가라고, 또 보자고.


 여든 여덟의 할머니와 아흔 하나의 할아버지.

 크나 큰 인생의 산을 함께 넘은 동반자, 혼자였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고개들을 서로 이끌고 밀어주면서 손 잡았을 사람, 큰 산을 오르며 함께 일출을 봤고  한낮의 하늘 턱에 걸린 볕을 쬐었고 황혼의 하늘을 함께 바라 봤을 사람, 산에서 내려와 함께 힘차게 걸어 온 길을 같이 돌아봤을 사람. 힘들고 기쁜 것들을 함께 했으니 이제 괜찮다고. 후회는 없으니 이제 됐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중략)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 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 김광석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中



* 메인 사진은 부암동 길에서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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