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서울 도보] 8. 상주-문경

by 은도진


밤새도록 비가 왔다. 창문 바로 앞에 철로 된 지붕이 있어서 밤새도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아늑하게 잤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빗소리인지.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는 곧 그친다고 되어 있는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전날 사온 김밥과 우유, 빵을 먹으며 창밖을 보았다.



3일째인 오늘 걸어가야 할 길은 25km 39,515걸음. 문경의 점촌터미널까지였다.



셋째 날도 논을 따라 걸어가는 여정의 연속. 소들은 길을 걷는 이방인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고, 비는 어제보다도 더 세차게 내렸다.



어제부터 계속 내린 비에 강물이 불어나 있었고, 어떤 구간은 하마터면 지나지 못할 뻔하였다. 물이 거의 다리까지 차올랐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는데 물살이 제법 세서 긴장감이 들었다.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겠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밤새 말린 옷과 신발이 금세 다시 젖었고, 끊임없이 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몇 년 동안 볼 논의 풍경은 다 본 것 같고, 몇 년 동안 맞을 비는 다 맞은 것 같았다. 걸어도 걸어도 논에, 걸어도 걸어도 비가 왔다. 가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서울까지 가냐고 해서 문경까지 간다고 했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대구에서 왔다고 하니까 '험미~'라며 놀랐다. 그 외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없이 오직 혼자 생각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생각 없이 걷는 시간이 전부였다.


중간에 잠시 쉬면서 간단히 간식을 먹기도 하고, 베토벤 노래를 들으면서 발걸음을 빨리 하기도 하였다. 역시 난 모차르트보다는 베토벤이 맞는가 보다.



석류가 발갛게 익고 있었고, 배들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비바람에 쓰러진 논들도 제법 많았다. 김수영의 시에서 풀은 누웠다가도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벼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걸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은 왜 쉽지 않을까. 왜 이렇게 걸어야만 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는 살 수 없는 것일지. 그리고 왜 이런 나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일지. 마을 곳곳을 지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나와는 참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정착하려다가 떠나고, 다시 정착하려다가 떠나는 나의 모습들.



이윽고 점점 도시가 가까워졌고, 내 발걸음은 다시 무아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걷는 게 나인지 내가 걷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온몸이 비로 젖고, 어깨, 다리, 발이 무감각해졌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누가 봐도 여행객의 행색으로 걷고 또 걸었고 마침내 문경에 도착했다.



처음 대구에서 출발할 때 언제 도착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늦은 시간에 버스 예매를 했었고,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문경에서 보내야 했다. 나중에 취소하는 한이 있어도 이른 시간 버스도 예매를 했어야 하는 건데 나의 오착이었다.


배가 매우 고팠기 때문에 콩나물국밥집에 들어가 황태해장국과 부추전, 모주를 시켜 배가 부르게 먹었다.



밥을 먹고 근처에 카페에 앉아 글을 정리하는데 마침 이른 시간의 버스표가 생겨서 급히 예매를 했다. 다행히 2~3시간만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첫째 날 35km 54,189보

둘째 날 28km 43,236보

셋째 날 24km 37,432보


총 87km 134,857보


물론 돌아간 적도 많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한 거리까지 하면 이것보다는 많을 것 같다. 어쨌든 부산-대구에 이어서 문경까지 내 발로 걸어왔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부산-서울의 거의 절반은 온 셈이다. 지난번에는 눈 때문에 기억이 많이 남았다면 이번에는 비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비를 맞으며 산도 넘고 논을 주구장창 걸었던 2박 3일이 어느 때보다도 소중할 것 같다. 한국의 끝이라면 끝인 부산에서 한국의 중간점인 문경까지 왔으니 이제 서울까지 갈 일만 남았다. 언제 또 도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서울까지 당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지인과 부산-서울 도보 여행을 이야기하다가 한국을 바닷가 쪽으로도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속초부터 시작하여 강릉-동해-울진-포항-부산-통영-여수-해남-목포-군산-보령-태안-서산을 거쳐서 인천까지 말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을 그때, 그 길을 자전거로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내 머릿속이 번뜩였다. 요즘에는 바닷가의 자전거 길도 잘 되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올해 말에 마라톤 풀 코스 도전이 있으니 그 이후에 하면 어떨까. 자전거를 사서 한국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인생이 별 것 없는 것 같아도 이렇게 새로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내 인생은 어디로 이어질까. 변수가 많은 여행처럼 내 인생도 어딘가로 가는 거겠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부산-서울 도보] 7. 선산-덕촌-낙동-화산-성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