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의사 박종석 Nov 26. 2019

이렇게나 사소한 일상.

2017년 6월 초여름의 토요일. 아침에 일어난 저는 오른쪽눈에 작은 점같은 것이 떠다니는 것을 알았습니다. 먼지가 들어갔나...눈꼽이 끼였나? 별거 아니란 생각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요.
개업자리를 알아보고 조언도 들을겸 강남역 근처에서 친구와 점심약속이 있었습니다. 설렁탕을 먹던 낮 12시쯤 오른쪽 눈의 작은 점이 조금 더 커진것을 느꼈습니다. 이게 뭐지? 자꾸 눈을 비비고 세수를 해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검은 점이 아니라 검붉은, 피에 가까운 색깔이었지요. 그리고 처음엔 먼지같던것이 어느새 작은 콩만한 크기가 되었습니다.

초고도근시라 시력이 무척 좋지않은 저는 (좌 : - 18D / 우 : -20D) 덜컥 겁이 났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세브란스에서 전임의과정중인 후배 안과의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별거 아닌거 같은데 이 점이 조금씩 커지네? 피멍이 든거같고.. 그리고 먼가 굴절되어서 보여, 이거 별거 아니지?'
'형 어디세요? 빨리 오셔야할거 같아요'
제 생각과는 달리 후배의 목소리는 자못 심각했고 저는 택시를 타고 세브란스로 갔습니다.
각막검사, 산동검사, 안구 CT...한시간 정도 검사를 하고 다른 후배도 두명이나 와서 심각한 표정을 짓더군요.

근시성 황반변성. 제가 받은 진단명입니다. 눈에 신생혈관이 자라나 생기는 병으로 가만히 두면 이 눈의 출혈이 눈전체의 초점을 가려서 실명이 된다는군요. 사실 이때부터는 너무 무서워서 후배가 무슨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납니다.
기억이 나는건 '실명이 될수 있다' , '아바스틴이라는 항암제를 쓸거다' '36세에 황반변성이 오는경우는 0.2퍼센트도 안된다'
이런말들이었습니다. 바로 수술복을 입고 눈에 항암제 주사를 맞았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너무 무섭고 두려웠지만 후배들이 보는앞이라 필사적으로 태연한척을 하였지요. 하지만 후배들의 표정이 이 병의 심각성을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을 압니다.
제가 심각한 치매나 뇌손상 사진을 보았을때, 조현병을 진단하고 이것을 환자보호자에게 설명할때 나오는 바로 그 표정이었습니다.

오른쪽눈에 안대를 하고 병원을 나오려는데 산동검사의 여파로 아직 왼쪽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요. 신촌 세브란스병원 안이비인후과 병원 바로 앞에는 택시 정류소가 없습니다. 거기서 200미터 정도는 걸어가야 대로변이 나오지요.
그 200미터는 너무나 멀고 험난했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철로 된 난간을 붙잡고 한걸음씩 걸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휴대폰 숫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부를 사람조차 딱히 없었지요. 부모님은 부산에 계셨고, 주변에 약한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실 도와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정도로 패닉상태였습니다.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빈택시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되었지요.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택시는 잡히지 않고 계속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데,
'저기요 아저씨 실례지만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말 고맙게도 지나가던 연대학생이 택시를 잡아주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불쌍해보였으면...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실명, 장애란 말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주사를 맞으면 금방 효과가 나올수도 있다는 말에 밤새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착하게 살겠다고, 기부도 많이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개원도 해야하고 결혼도 하고싶습니다.
36세의 젊은 의사에게 실명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3주에 한번씩 항암제 주사를 맞으러 갈때마다 제발 조금만이라도 나아졌으면, 좋아졌다는 얘길 들었으면 하는 생각에 울었고 불안했습니다. 안과 대기실이 앉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재판을 기다리는 죄인인것처럼 무섭고 초조했습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동정받고 싶지 않았고 걱정만할게 뻔한 부모님이 울고불고하시는 모습은 더욱 보고싶지 않았지요.
만약에 항암제 주사가 듣지 않으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자란 생각을 몇번이나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연락을 끊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더 비참해지기 싫었으니까요.

2017년 11월 저는 6번의 항암제 주사를 맞고나서야 치료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주치의인 형택이는 솔직히 상태가 너무 안좋아서 회복이 안될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괜찮다는 말이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제 죽지않아도 되겠구나란 생각에 계속 울었습니다.

2017년의 6월부터 10월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힘들었기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동정을 받고 싶지도, 병을 이겨내서 지금은 잘살고 있다는 식의 관심이나 응원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치료받으러 오실 환자들이 저를 '건강한 사람'으로 여겼으면 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조금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철저히 혼자였고 주변의 누구도 믿지 못하고 도와달라 말하지 못했던 저는 그뒤부터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남은 인생은 보너스다...라는 심정으로요.

카카오톡을 다시 시작했고 친구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2018년에 저는 개원을 했고 2019년에는 운좋게도 책을 낼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못했지만 제옆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은 많이 못벌었지만 작은 의원에서 마음이 우울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해줄수 있습니다.

이 사소한  일상의 모든것이 그저 감사하고 기적같습니다.

저는 3달에 한번씩 안과에 가서 상태를 검사받습니다. 여전히 오른쪽 눈에는 작은 멍같은 흔적이 보이고 약간의 굴절이 있습니다. 아마 제가 외과의사였다면 은퇴해야 했을지도 모르지요. 정신과 의사가 된것이 참 다행입니다.

제 마음에 욕심이 생기고 행복하지 못하다 느낄때, 성공한 친구들이 부럽고 우울한 날에는 제 오른쪽 눈에 남은 멍을 생각합니다.
환자들을 보는게 피곤하고 지치는 날엔 무섭고 지옥같던 안과 대기실을 떠올립니다. 의사의 입에서 무슨말이 나올까에 노심초사하던 친절하고 따뜻한 말한마디가 그토록 간절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저는 참 질투가 많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존감도 낮았고, 늘 남과 비교하며 가지지 못한것들에 불만스러웠습니다. 환자가 되어보고 나서야, 실명의 공포를 경험하고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충분치 않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것에 감사함을 가져야한다는것.
성공하고 유명한 의사를 목표로 할게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