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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pr 24. 2021

얇은 표면의 시대

  점점 얇아진다. 게다가 가볍고 가늘어진다. 그렇게 변해간다. 물질이건 정신이건...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영하는 문화에 대한 상징인가. 아니면 그럴싸해 보이면서도 쉽게 소비하고픈 욕망의 발로인가. 만지면 깨질 것 같고 다가가면 튕겨낼 듯하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이지적(理智的)이면서도 표독(慓毒)하다. 


  안을 살짝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다가서서 만지려고 하면 막혀있다. 꼭 유리 같다. 유리라는 소재는 투명하고 청명하고 산뜻하며 세련되었지만 만지면 단단하고, 조금 허물고 접근하려고 힘을 주면 반드시 깨지거나 터진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다. 서로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교육과 좋은 외모로 무장했지만 절대로 유리막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껍데기의 문화. 보여주는 문화. 바로 포장의 시대.


  세상은 매끈한 표면화가 되어간다. 평평하고 가지런하며 단순하다. 돌출과 음영은 점점 사라져 간다. 틈이 생겨서 세월의 먼지가 스며들고 손때가 묻는 것을 거부한다. 손에 거슬리면 안 되고 하나로 이어지는 통일감을 너도나도 요구한다. 모든 버튼이 사라져 가는 스마트폰, 창대석과 입체적 파사드가 사라져 가는 건물 입면, 종잇장 같은 얇은 TV,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매끈한 자동차, 음식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사각의 하이라이트 쿡탑... 이것들은 모두 아주 미세한 손의 터치만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작동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열에너지도 평평한 표면에서 나오고, 바흐의 변주곡도 평평하고 차가운 스피커 표면에서 흘러나오고,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내는 행위도 얇은 카드 표면에서 흘러나오고 정치의 권력도 삶의 희로애락도 모두 평평한 모니터 액정에서 흘러나온다. 


  주름진 음양의 산물은 모두 사라져 간다. 사람이 손으로 만지는 것 하나하나 그 돌출의 깊이가 있어서, 시간이 베어 들면서 가까운 부분은 닳고 먼 부분은 싱싱했던 기억은 도태된다. 공간을 유영하며 불어오는 바람에 사방으로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꽃들도 평평한 브라운관 속에서 존재한다. 이제는 인간이 어떠한 대상에 애정을 주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영원하고 오래가는 것은 없다. 하루하루 변하고 있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리는 시대. 애착을 가지려고 하면 그것은 나를 떠나게 되어있고 교체해주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더 이상 주름지고 울퉁불퉁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온갖 인생의 질곡을 짊어진 사람이 노력해서 성공하는 모습은 점차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사극도, 현대극도, 연극도, 음악도 모두 마네킨처럼 매끈하고 표면적인 사람들이 아기자기한 투정을 부리면서 시청자들의 오감을 만져주는 것만을 다루게 될 것이 뻔하다. 


  물질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그러할 것이다. 일체화된 세상, 표면화된 문명, 소모되어가는 과학기술은 인간의 정신에도 스며든다. 그 무엇이든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하게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가족도 없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 것인지 반문하게 될 것이다. 서로 마음을 주는 것이 어렵고 표면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될 것이다. 껍데기는 더욱 화려하고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진화할 것이고, 내면은 사용되지 않아 더욱더 퇴화될 것이다. 성형수술과 체형관리가 삶의 목표가 될 것이며, 평평하고 매끈한 껍데기를 갖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외모지상주의가 극에 달할 것이고, 각종 화장술과 변장술 미용과 체형관리의 비법들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나는 목마르다. 짜고 달고 맵고 쓴 음식을 먹은 후 급하게 중화시킬 맑은 물을 찾는 사람처럼 갈증이 난다. 나는 표면에서 전해지는 인덕션 레인지의 전기열보다 굴곡지고 평평하지 않은 냄비를 덥혀주는 장작불에 애착이 간다. 나는 날카로운 표면 위에서 미동 없이 터치하는 게임들보다, 버튼을 손가락으로 마구 두들겨서 손을 움직이며 노는 오락실 게임이 좋다. 나는 인터넷으로 제출하는 시험지보다, 나무 곰팡이 냄새가 나는 교실에 들어가는 과정과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며 귀를 세우는 행위가 좋다. 나는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진 우주선 같은 벤츠 신형 자동차보다, 라디에이터의 형상이 그대로 보이고 범퍼와 몰딩이 돌출되어 공간적 자태를 뽐내는 포니자동차가 더 좋다. 나는 앉은자리에서 수만 가지 색을 자유롭게 주무르며 갖가지 펜의 종류를 체험해볼 수 있는 애플 펜슬보다, 철로 만들어진 칼로 나무를 깎아 흑연을 드러내고 그 분말을 종이에 긁어 흩뿌리는 사각거림이 더 좋다. 인간은 먹고싸고숨쉬며땀내는 성질을 절대 변화시키지 못하는 존재.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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