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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y 25. 2021

소나기 / 황순원 / 1953

  소설이 갖는 아름다움의 결정체. 이보다 더 구체적인 수식이 필요할까. 노래는 멜로디가 간결하고 따라부르기에 수월할수록 명곡이요, 소설은 쉽게 읽히고 기억에 오래 남을수록 명작이다. 인류가 향유하는 그 모든 가치들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길고 복잡하고 난해하여 현학적인 것들이 아닌, 쉽고 직관적이면서도 심플하여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치를 발하고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들 말이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그러하였고, 김소월 시인의 작품들이 그러하였고, 피카소와 마티스,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들이 모두 그러하지 아니한가. 인생의 오랜 연륜과 철학과 역사를 하나의 감성으로 녹여내어 아주 원초적이고 단순한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작업. 나는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느낀 언어 미학의 극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학시절 교과서에서나 한번 토막 난 지문으로 접했을 것이 자명한 터, 이 길지 않은 단편소설을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음미해가면서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등하불명이라고 너무 익숙한 것들은 왠지 이미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있다고들 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 느리게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에 풍경과 그림을 더 많이 그릴 수 있게 된다. 작가의 짧고 단순한 문장이 끝나면, 독자들은 온갖 자유로운 상상의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느리게 읽고 곱씹어 읽을수록 그러한 뇌세포의 운동은 격렬하다. 이것이 훌륭한 소설의 마법이었구나. 등장인물의 감정과 의식과 생각도 짧고 강렬한 어구 하나로 상상이 가능하다. 그것은 생략의 표현이요, 절제의 문법이다. 인간의 감정도, 아름다운 풍경도 결국 많은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 가릴 것 없이, 대가의 단편 소설들은 언제나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사뿐하면서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내려다보았다. 물기가 겉혀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숨어서 내 하는 꼴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짚었다. 한 발이 물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소년은 공연히 열적어 책보를 집어던지고는 외양간으로 가, 소 잔등을 한 번 철썩 갈겼다. 쇠파리라도 잡는 척.


  소나기가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이제는 잃어버린 전원생활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남북 분단과 이산가족의 문제, 그리고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으로 인하여 시골은 성장할 때 떠나야 하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돌아가기 어렵고 아련한 마음의 고향으로 인식되어갔다.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의 이정표 같기도 하고, 산업화되면서 희생하고 포기해야했던 아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소나기는 이러한 시정(詩情)을 마치 우리가 고향에서 자랄 때 겪었던 느낌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린 남녀 주인공들의 어설프고 맑은 감정을 통해서 정서적 귀향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댄다. 허수아비가 대고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
소년이 참외 그루에 심은 무우 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밑을 뽑아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밑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낸 다음 손톱으로 한돌이 껍질을 벗겨 우적 깨문다. 소녀도 따라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본다. 그리고는 소녀 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훌륭한 작품의 첫 문장들은 대개 전체의 줄기를 잡아 뿌리째 흔드는 힘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상의 날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등장하는 모든 첫 구절들이 없었다면 그 작품들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도 첫 문장에서 모든 주제와 소재, 감정과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초시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거나 한 듯이.


  소년과 소녀라는 단어는 이 작품의 시점을 비롯한 동심의 세계와 순수성을  피력한다. 게다가 증손녀라는 가계의 혈통을 강조함으로써 여자아이가 보다 큰 무리 즉 일반적인 서민 가정에서 동떨어져 있는 조직에 속해있다는 거리감을 조성한다. 거리감은 이룰 수 없는 관계의 반증이며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의 복선이기도 하다. 게다가 개울에 손을 담그고 있다고 하니 맑고 투명한 물과 여자아이의 손의 의미가 서로 잘 중첩이 되고 있으며, 끝내 '서울'이라는 2음절의 단어로 시골 남자아이와 서울 여자아이라는 운명적 관계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고 있다. 몇 번을 읽을수록 함축적이고 강렬하다.


  황순원 작가의 작품들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만드는 지식] 사에서 제작된 황순원 단편집을 추천한다. 많은 작품들이 실려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 다소 작고 얇아 휴대하기에 좋고 '소나기'를 비롯하여, 원응서 작가에게 보내는 수필인 '마지막 잔'과 '독 짓는 늙은이', 그리고 '소리그림자'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엮은이의 해설 또한 예리하고 분석적이라 작가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을 많이 먹다 보면, 어느 순간 담백하고 심심한 건강식품을 찾게 되는 것처럼 어느 순간 황순원의 작품들이 계속 들어왔다. 나의 정서도 힐링이 필요했던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시대처럼 온갖 첨단기술과 문화적 혜택을 누리기 쉬운 환경이 나로 하여금 원초적인 감성을 더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벌레 한 마리 없는 고층아파트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평생 주변에 흔하게 있는 꽃과 나무이름 하나도 모른 채 작은 스마트폰 액정 속에서 울고 웃는 나 자신이 디지털 문화와 함께 메말라 가기 전에 나는 더욱더 황순원의 소나기와 같은 작품들에 젖어들고 싶다. 오로지 그러한 것만이 나 같은 공학도가 살아갈 길이 아니던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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