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으며 살던 우리의 역사가 갑자기 서구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리던 도중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독특한 전원적 아름다움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시기가 있었다. 언문이 일상화되고 신분차별이 없어질 무렵인 구한말에서부터 남북 분단을 전후한 무렵까지의 근 50년간 시골의 모습. 물론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의 강도는 여전하였지만 무너진 조선시대의 풍습을 뒤로한 채, 남녀는 보다 뜨겁게 사랑하였고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목소리들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여인들은 방 안에만 있지 않고 문 밖으로 나와 생활의 역동성에 몸을 실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하였으며 상거래와 제조업이 활성화되었고 자본주의가 스며듬에 따라 인생의 희로애락이 더욱 극적으로 변모한다. 수 천년을 이어온 구시대의 관습을 탈피하고 식민문화와 분단 비극을 고스란히 감내하여 안으로 끌어안아 삭여낸 독특한 시기. 우여곡절의 역사가 향토적 언어로 표현되고 삶의 질곡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김유정의 동백꽃, 황순원의 소나기, 김동인의 감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청준의 서편제를 비롯하여 박경리의 토지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활동하던 작가들의 소설 작품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금자탑을 쌓았으며, 오늘 언급하고자 하는 김용익의 작품들도 당연히 이러한 맥락에 포함된다.
왜 우리는 학창 시절 김용익을 배우지 못했을까. 김용익이라는 이름은 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혹시 한국문단이 김용익에 인색하였을까?
김용익은 1920년 통영에서 태어난다. 박경리와 동향인 6년 선배.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48년 도미하여 플로리다와 켄터키에서 유학하던 중 고국의 전쟁 소식을 듣는다. 1958년 그는 귀국하였으며, 분단 후 어지러운 한국의 현실 속에서 대학에 재직하던 중 1972년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따지고 보면 그의 국내 생활은 별 기반이 없는 셈. 그래서 그의 첫 데뷔 작품 '꽃신'(The Wedding Shoes)은 1956년에 미국에서 먼저 발표된다. 이후의 발표하는 단편들도 미국에서 발표가 되었으며, 북미와 유럽에서 극찬을 받으면서 화제가 된다. '꽃신'은 작가가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여 국내에서 1963년 다시 발표하지만, 아무래도 한국 문단의 귀속 주의적 입장과 배타적인 장벽 때문에 크게 이슈화 되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고집스럽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던 외골수 김용익 작가 자신의 성격도 한 몫하였겠지만.
꽃신을 읽다 보면 영어로 문학을 해왔던 작가의 근원적 필력을 감지하게 된다. 한국현대문학의 거장들이 사용하는 토속어와 방언의 기가 막힌 표현력과 그 강력한 힘을 한번 맛본 사람이라면, 당시 우리의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우면서도 의미 없는 일인지 알 것이다. 왜 박경리 선생은 자신의 작품 '토지'를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계획할 당시 '별당아씨'라는 단어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한다면 해외 출판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한탄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오히려 김용익 작가가 영어문화권에서 문학을 배우고 먼저 작품을 내었던 것이 더욱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대가들의 작품들이 해외에서 번역 문제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평가절하되고 있는 상황을 견주어볼 때, 오히려 한국어가 갖는 그 표현의 힘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스토리의 힘으로 승부하여 외국어로 우리 고유의 정서를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 더욱 대단하고 값지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저 판자 위에 꽃신 다섯 켤레만이 피난민으로 가득 찬 시장의 공허를 담고 있다... 나는 가끔 그녀보다 뒤져가며 꽃신에 담긴 흰 버선발의 오목한 선과 배 모양으로 된 꽃신을 바라보았다. 그 선은 언제나 달콤한 낮잠을 자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나는 꽃신이 다른 사람에게 다 팔려가기 전 한 켤레 가지고 싶었지만 꽃신 아닌 슬픔을 사지나 않을까 두렵다... -꽃신-
이러한 언어적 배경 때문인지 '꽃신'을 비롯한 김용익 작가의 작품들은 문장이 간결하다. 지역적 방언이 쓰이지만, 마치 상징처럼 절제되고 여운이 남는다. 문장이 끝나는 부분에서 긴 여백이 남고 그 부분을 독자가 그림을 그리며 채워나간다. 우리가 자랐던 고향, 우리가 키우던 소와 작물, 바다와 수풀들이 고스란히 눈 앞에 선연하지만 각 주인공들과 운명의 고난을 함께 공유하듯 정감이 있고 별처럼 빛난다. 등장인물들의 아주 세밀한 감정의 흐름이라든지, 주변 사물들과 자연이 움직이는 모양과 형상들을 정밀하고 투명하게 관찰해서 그 상황과 분위기를 그림처럼 풍요하게 전달해준다.
나는 이러한 한국의 작가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욱 많이 인정받은 작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유수의 상을 수상하고 외국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극찬을 받은 천재. 권위와 명예를 벗어나 청빈하고 고립된 삶을 추구하였던 야인(野人). 우리말과 우리 정서와 우리 문학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조용히 사라진 작은 촛불. 언젠가 김용익의 작품들이 그 가치에 맞는 대접을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조카분의 회고록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그는 일생 별로 가진 것도 없었고, 교수 월급과 출판된 책에서 나온 얼마간의 인세로 비교적 청빈하게 살았다. 작품이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 문학계에서 인정을 받아 출판되었으나 어느 것 하나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없었다. 또 그는 베스트셀러 작품을 혐오하였고 결국 베스트셀러의 작품을 쓸 수도 없었고 또 쓸 생각도 안 했다... 그는 남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고 자신의 외모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평소에 입는 옷도 남에게 오해를 살 만하였다. 피츠버그 듀케인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한 번은 구내 경찰이 웬 거지 같은 사람이 학교 안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는 그를 구내 파출소로 끌고 갔다고 한다.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내가 이 대학 교수다"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지 이름을 묻고는 즉시 교무실에 전화해 확인을 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보내 주더라고 하였다. 그 다음 주 대학신문에 삼촌 기사가 특집으로 나며 그 허름한 모습이 신문 표지에 실린 후 교내에서 그 경찰을 만나니 삼촌을 향해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고 했다. 그는 술도 담배도 안 했고 신문도 텔레비젼도 안 보았다. 한평생 미국에 살면서 운전면허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이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녔다. 신용카드 하나도 없었고 시계도 없이 살았다. "시계가 없이 생활에 불편하시지 않느냐?"고 내가 묻자 "모든 사람이 다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데 시간을 물으면 되지 시계를 가질 필요가 무엇 있느냐?"고 하였다. -조카분의 회고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