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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l 05. 2021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

의유당일기, 호동서락기, 서유록

  '나의시간'출판사의 또 다른 조선시대 여성 기록문 시리즈를 접하게 되었다. 전에 포스팅하였던 '병자일기'와 '자기록'에 이어서 3번째 발행본이다. 이 책에는 3명의 여성이 기록한 여행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영조 시절 무렵부터 해방 전까지의 시기이다.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기록물, 특히 일상의 기록들을 발견하는 기쁨은 얼마나 설레고 신선한 일인가. 게다가 외부활동이 제한되고 집 안에서 생활해야 했던 조선시대의 여인들의 기행문이라니, 마치 집 밖으로 뛰쳐나와 산천 바다를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하고 싶어 했던 여인들의 들뜬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하였다.


  첫째 작품은 의유당 의령 남씨가 기록한 '관북유람일기' 이다. 의유당 남씨는 함흥판관을 지낸 신대손의 부인이자 효의왕후(정조비)의 이모 이기도 한데, 남편 신대손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으로 같이 옮겨간 이후 해당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글로 기행문을 남겼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왕족과도 가까운 명문대가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생활의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인 성향과 호기심 같은 것이 더해져서 당시에 흔하지 않았던 여성의 여행이 가능했으리라고 판단한다. 1769년과 1771, 1772년에 걸쳐서 3편의 기록문을 남기는데, 비록 길지 않은 기행문이지만 의유당의 호쾌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 문장 문장마다 드러나고 있으며, 낙민루, 북산루, 동명(함흥) 지역의 풍경과 아름다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을 신선한 시각으로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허가권을 가진 남편에게 끈질기게 부탁하여 여자의 외출과 여행을 허락받고 자신이 고대하던 동명의 일출을 목격하는 과정은,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설렘과 집요함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여행자의 행로와 시선의 움직임, 기분 같은 것을 매우 자세하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어서 마치 옆에서 보는 듯 하였다.


한참 뒤에 동쪽의 별들이 드물고 달빛이 차차 옅어지며 붉은색이 뚜렷해져서 시원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가마 밖으로 나서자 좌우 시종들과 기생들이 둘러싸고 보기를 재촉했다. 이윽고 날이 밝으며 붉은 기운이 동쪽에 길게 뻗치니 진홍 비단 여러 필을 물 위에 펼친 듯 드넓은 푸른 바다가 일시에 붉어지며 하늘에 자욱하고, 성난 물결 소리는 더욱 크고 붉은 담요 같은 물빛이 황홀하게 환히 비치니 차마 끔찍하였다


  두 번째 작품은 김금원이라는 여성의 한문 여행기이다. 강원도 원주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녀는 1830년 14살이 되던 해 남자 옷으로 갈아 입고 집을 나선다. 그것은 제천에서 시작하여 금강산과 관동팔경, 설악과 서울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으며,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20년이 지난 1850년 기행문으로 기록한다. 김금원이라는 이 독특한 여성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집안일을 하지 못하고 부모가 글을 가르쳤다고 하니, 아무래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인 능력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러한 맥락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행기록뿐만이 아니라 경전과 역사, 시문에도 탁월했다고 한다. 어려서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글을 읽고, 남장을 하고 여행도 했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는 금앵이라는 이름으로 관기 생활을 하면서 시로 이름을 날렸고, 의주부윤 김덕희의 소실이 된 이후에는 서울 용산 삼호정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여성들과 같이 시회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 여성의 이력을 보면 19세기 변화의 물살이 일어나고 있던 조선 말기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그녀의 글은 유려하고 섬세하며 힘이 있다. 갇혀 지내는 여성의 틀을 깨고 싶어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오고, 여러 가지 경험하고 보고 느낀 것들을 글로 남겨서 그 작은 이름을 역사의 남겨두었다. 나는 김금원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이 아닌, 여행자와 시인으로서의 기품을 느낀다. 자신을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에 대한 노력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눈으로 산의 거대함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사물의 많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변화에 통달하고 그 이치에 도달할 수 없어 국량이 협소하고 식견이 트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남자는 사방에 뜻을 두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여자는 발이 규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오직 술 빚고 밥 짓는 것만을 의논해야 한다. 옛날 문왕과 무왕, 그리고 공자와 맹자의 어머니는 모두 성스러운 덕이 있고 또 성인인 아들을 낳아 이름이 오래도록 뚜렷하게 남았으나 그 밑으로는 일컬을 만큼 두드러진 사람이 아주 없거나 조금 있을 따름이다. 어찌 여자들 가운데만 유독 무리들보다 빼어난 그런 사람이 없어서겠는가. 혹시라도 규중에 깊이 있어 그 총명과 식견을 스스로 넓히지 못하고 끝내 사라져 묻혀버린 것이라면 슬프지 않은가


  세 번째 작품은 강릉 김 씨 부인의 '서유록'이다. 그녀는 1913년 남편과 딸을 데리고 강릉을 출발하여 대관령을 넘어 서울을 여행하고 강릉으로 다시 돌아오는 총 37일간의 여정을 한글로 기록한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세상 물정에 관심이 많았으며 글쓰기도 능했다고 하는데, 장손의 죽음과 서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딸의 병을 고치고자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서 시골 여성의 서울구경을 가능케 했을 것 같다. 그녀의 여행은 52세에 이루어졌으니, 천지개벽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난 뒤의 결심 같은 것이 그녀를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일제 식민시절의 서울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들과 문화적인 차이, 발전하는 신문물에 대한 느낌 같은 것들도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내가 그 시대로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북송현 대안동 소안동 재동 원동으로 돈화문 밖 이르렀으나 대황제폐하 계신 창덕궁 정문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궁장 안의 경치는 궁중 정원 중에 제일인데 이야기 잠깐 들어보니 맑은 내와 흰 바위, 푸른 솔과 푸른 대나무가 옥류천의 가경이라 했다. 동편으로 종묘를 지나 흥화문 들어가서 동물원을 구경했다. 평생 보지 못하던 짐승이니 이름인들 다 알겠는가. 앵무새, 공작새, 칠면새며 서양 쥐, 서양 돼지며 사자며 낙타며 호랑이며 곰이며 원숭이도 있고 이름 모르는 것들은 기록하기 어렵다. 그중에 코끼리와 수마는 흉측하고 기막혀서 도리어 보기 싫었다. 식물원에 잠깐 가서 각색 화초를 구경하니 그 역시 놀라웠다. 이곳은 전날 과거를 보게 하던 춘당대인데 동식물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책은 아직 절판은 되지 않았으나, 2019년에 출간된 책이 아직도 초판 1쇄로 팔리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관심이 저조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국공립 도서관 등에서라도 꼭 마련하여 사람들이 잊지 않고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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