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문화사
뛰어난 학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과 연륜이 녹아든 수필은 읽는 이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수필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그것이 어떠한 전문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단편적 이야기들이므로, 우리는 소파에 누워 가볍게 책을 들어 올리고 살랑거리는 바람결을 느끼며 읽게 되는 것이니 통독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층 또한 광범위하다.
통상 수필의 기법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일상의 경험을 작가 자신만의 가치관과 연륜에 녹여내어 뒤집고 승화시켜서 맛깔나게 표현하는 것이 필요할진대, 민주화운동 이후 세대의 사람들이 펴내는 최근의 수필집이라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하고 싶어, ~했어, ~괜찮아, ~어때서, ~라면 좋겠다, ~할 필요는 없어, ~하기로 했다... 류의 어리광과 투정식의 하소연 같아서 나처럼 흡수성이 부족하고 깨달음의 능력이 미진한 존재가 감동을 얻어내기에는 다소 얇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러한 작품들을 읽어보면 감각적인 제목과 미술작품 같은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세련된 북커버와는 대조적으로, 막상 깊은 연륜과 진지한 삶의 통찰이 결여된 말장난 식의 넋두리에 여러 번 실망을 하던 차, 우리나라 옛 선비들의 편지글이 실린 작품들을 읽다가 우연히 고전 수필집을 별도로 하나 추가로 발견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우리 고전수필'은 손광성, 임종대, 김경수 세 학자가 우리 옛 고전 단편 수필들을 엄선하여 엮은 책이다.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시기는 광범위하지만 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이 책에는 70여 편의 작품이 등장하는데, 엮은이들이 7가지 주제로 정리하여 분류하였다. 모두 한문 작품을 번역한 것이며, 기라성 같은 성현들의 진귀한 글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문헌 호사를 누리게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신한 시각과 폭넓은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고문학이라고 하면 왠지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것이라든지 전통 예의범절에 대한 강론만 즐비할 것 같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생활의 다방면에서 깊은 사색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번다한 현대문명의 물질적 가치관이 완전히 배제된, 자연을 벗 삼고 가축을 낙삼아 살아가는 이야기에는 자연을 마주하는 겸손함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자존감이 베어 들어 있다. 사람의 인연과 생명을 귀하게 여겼으며, 주변 사물과 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고 교훈을 얻었다. 우스꽝스럽게 늙어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형상을 재치와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남은 여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는 노련함이 엿보인다. 타인의 독특한 습관을 관찰하며 삶의 진리와 깨달음을 얻었으며, 스승의 노고를 존중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심을 잃지 않았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던 시절, 사별한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 애틋하였으며 자식에 대한 걱정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 수필집은 편광 선글라스를 쓰고, 선크림을 바르며, 금속으로 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콘크리트 아파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인공적인 삶의 외형들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거닐어야 할 수목원을 닮았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원리를 깨닫고,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가치 있게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시기에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 깊었던 몇 구절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사람의 마음이란 변덕스러운 것이어서, 늘 육지같이 평탄한 곳에서 살다 보면 그것이 몸에 배어서 도리어 방심하기 쉽고,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갑자기 두렵고 떨려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무서우면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도리어 안전하지만, 안전하다고 해서 방심하게 되면 반드시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나는 편안한 곳에서 안심하다가 스스로 위험에 떨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위험한 곳에서 살면서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 배에서 사는 어느 노인과의 대화, 권근 -
소리와 빛은 모두 외물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귀와 눈에 장애가 되어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 밤새 강을 아홉 번 건너다, 박지원 -
군자는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모욕하지 않으며, 무식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에게는 원망이 적은 것이다 -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 신흠 -
밤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가장 늦게 나며 재배하기도 어렵고 기르는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자라기만 하면 쉽게 튼튼해지며 잎이 매우 늦게 돋지만 돋기만 하면 곧 그늘을 쉽게 만들어준다. 꽃이 매우 늦게 피지만 피기만 하면 곧 흐드러지며 열매가 매우 늦게 맺히지만 맺히기만 하면 곧 수확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밤나무는 모든 사물에 공통되는 차고 이지러지고 줄어들고 보태는 이치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밤나무 예찬, 백문보 -
어느 날 집안 일가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데 여자들이 모두 모여 담소한 일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함께 앉아있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으니, 시어머님께서 "새아기는 왜 말이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어머님께서는 꿇어앉아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문 밖에 나가보지 않아서 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 나의 어머니 사임당의 생애, 이이 -
대개 색이란 음란한 자가 보면 구슬처럼 아름답고, 정직한 자가 보면 진흙처럼 추하다 - 이상한 관상쟁이 이야기, 이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