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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Sep 09. 2021

대한제국 황실비사/ 곤도 시로스케 /1926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사라진다.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고 버티고 다시 일어섰던 왕조의 함선이 침몰한다. 서서히 가열되는 물속에서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른 채 죽어가는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일본의 치밀한 계략과 친일파들의 처절한 매국행위로 이 씨 왕조의 운명은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전 세계 인류문명의 판도가 바뀌는 시기였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지구촌 반대편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서구 열강들은 물질적, 기술적으로 유사 이래 눈부신 변화를 거듭하였다. 그들은 폐쇄적으로 살아가던 힘없고 나약한 나라들을 기웃거렸으며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동양은 서양의 먹잇감이 되었으며, 수백 년간 우리나라를 귀찮게 하던 일본조차 미국에 먼저 두드려 맞고 1854년부터 항구를 열어준 뒤 개화를 시작하였다.


  개화(開化)라는 단어는 얼마나 찬란한가. 구시대의 산물들이 제거되고 새롭고 신선한 것이 밀려들어오는 그 역동성. 더러운 것이 정리되고, 불편했던 것들이 편리하게 바뀌며, 느렸던 것들이 빨라졌고, 약했던 것들이 강한 것이 되는 신세계. 사람은 보다 사람다워지고, 아름다움은 더욱 아름답게, 문명의 단계는 수준 높은 진보로 나아가는 유토피아의 바로 그 이상향.


  하지만, 원래 아름다움이란 더러움 속에서 나오는 법. 우리나라의 개화 과정은 그리 세련되지 못하였다. 정조 임금 이후 나라의 기틀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의해 타락하였으며, 지구촌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양반들과 왕가 귀족들은 자기들의 잇속 챙기기만 바빠 백성들의 삶과 나라의 운명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끝내 우리는 우리보다 단지 50년 먼저 개항하였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난 이후부터 치밀하게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이전의 계획들을 차근차근 수행한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기분이 나빴던 일본은 고종이 일본에 비협조적이라고 생각하여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교체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내세워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향으로 추천을 받아서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게 된 사람이 '곤도 시로스케'였으며, 1907년부터 근 15년간 우리나라의 왕가에서 근무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책으로 출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대한제국 황실비사(원제:이왕궁비사)' 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식민시절 역사를 증언하는 매우 독특한 자료이다. 객관적인 사건의 발생이나 인물들 간의 이해관계, 그리고 우리가 알기 어려웠던 일본인들 관리의 내부적인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매우 주목할만하다. 특히 곤도 시로스케는 순종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당시 궁궐 내부의 자세한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침략자의 시선에서 기록된 바, 책 내용 전체를 맹신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특히 작가의 주관적 생각이나 가치관은 매우 편향적이어서 일본 황실 찬양 일색이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구한말의 옛 조선을 일본이 수렁에서 건져내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의 신중한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 책을 감수한 이언숙 통역가와 신명호 교수는 책의 서문에서 독자들의 올바른 독서를 위한 강도 높은 경고와 당부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의 저변에 흐르는 인식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독자들은 저자가 조선 황실의 궁내부와 이왕직에서 근무하면서 접한 조선 황실 관련 서술이나 그 밖의 표현에서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일본의 조선 인식, 아시아 인식을 100년 전의 표현을 통해 읽어내고 그 당시의 조선인식, 아시아 인식이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변형을 꾀하여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통역가 이언숙)


일제의 침략 만행을 모두 조선에 문화 혜택을 주기 위한 시혜라고 여기는 곤도 시로스케의 이러한 생각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례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들이 이 책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려면 곤도 시로스케의 이러한 시각을 한 수 접어둘 필요가 있다. 그의 시각을 하나하나 시비 걸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학자 신명호)


  이 책의 목차는 크게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궁에 들어간 이야기. 한일병탄 전후. 순종이 일본을 방문한 일. 고종의 장례식 전후. 그리고 영친왕과 덕혜옹주 관련 사건이 담긴 마무리 이야기로 전개된다. 각 챕터들은 십 수개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식민시대  가장 암울했던 시기의 궁정 내부를 차근차근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의 치밀하고 영악한 계략보다도 당시 우리나라 권력층들의 악랄함과 사악한 이기주의에 아연실색하였다.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매국행위의 진상을,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의 시각이 아닌 외국인, 게다가 한일병탄의 장본인인 일본인의 입으로 전해 듣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넘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곤도 시로스케가 우리나라 친일파들의 경쟁적인 친일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 대단히 흥미로운 묘사를 하였는데, 그들의 공로가 한일병탄의 업적을 이루는데 매우 뛰어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서는 평판이 가장 나쁜 사람일 것이라는 조롱을 섞어 우리나라를 비하하고 비천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을 그럴싸한 문장으로 포장하여 은밀하게 이중 살인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윤덕영 자작은 아마도 조선에서 평판이 제일 나쁜 인물로 1위일 것이다. 비록 그 인격에 결함도 있지만, 자신이 믿는 바에 매진하고 일 앞에서 용감하게 종횡무진하며 능력을 발휘하여 난국을 해결하는 힘은 확실히 조선 병합 역사에서 첫째로 손꼽을 수 있는 인물이다. 이완용 후작조차 그의 안중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암암리에 자신이 당시 조선 병합에서 어느정도 큰 공을 세운 데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완용 후작이 사망한 뒤에는 조선 귀족으로서 앞으로의 활약에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이 윤덕영 자작과 박영효 후작뿐이다.


  일본인의 문화,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그 집착.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상대방에 대한 예절에 집착하고 공공질서와 법도(메뉴얼)에 목숨을 건다. 이는 어쩌면 아직도 제국주의 가치관에 갇혀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의 욕구과 약육강식의 승자독식 문화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기작 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의 묘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일본인의 시각이라서 오히려 전혀 오해를 사지 않을 만한 의도, 다시 말해서 일본에 대항하고 일본을 불편하게 할 만한 우리나라 사람과 사건을 평가할 때 작가가 충분히 불리한 입장에 있을만함에도 불구하고 관점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작가는 3.1 운동을 묘사하면서 아래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여,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3.1 운동을 강압적이고 비자발적인 운동이라고 비하하는 친일파들의 논리를 일소(一掃)하도록 도와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돌아보니 수천 명의 군중들이 바닷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고 있었으며 작은 폭력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요컨대 총소리 하나 울리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로 무저항주의자가 만나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찌 흥미로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친일민족 반역자들의 투철하고 끈질긴 매국행위를 올바르게 목격하고 판단하였으면 좋겠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비열하면서도 광적인 행동으로 서로의 친일행위를 경쟁해가며 임금을 조롱하였다.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방법과 생각을 동원하여 나라의 주권을 넘기고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하사품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윤덕영과 이완용의 연극 같은 친일매국행위는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만약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분노와 슬픔이 치솟아 제대로 독서를 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병합당시 민심이 흉흉하여 정국은 분규상태에 있었으면 피를 보게될지도 모를 참화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고 조선의 국운과 왕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윤덕영 자작이 스스로 앞장서서 대외적으로 총독의 방침에 순응하고 대내적으로 이완용 수상과 협력하면서 근친간의 친분으로 전하에게 험악한 주위 형세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윤덕영 자작이 왕실의 존엄과 영광을 영원히 보전하기 위해서는 병합을 단행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왕 전하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하던 그 때에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공적이 있다.


  곤도 시로스케는 일본인 특유의 돌려 말하기 화법과 극도 언어 미화를 사용하여 자신이 모시고 있었던 순종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덕담을 드러내고 예의를 지키고는 있지만, 그의 가치관과 의식 저변에 흐르는 침략자의 시선이라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했던 병탄(倂呑)'이라는 위선, 혹은 '무질서한 조선인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킨 구세주'라는 망상이 씌워져 있기 때문에 글을 읽는 내내 가슴 한 구석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따른다. 어쩌면 작가의 그러한 순종황제에 대한 예의는 작가 자신이 근무했던 곳에 대한 자부심과 스스로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자기기만과 허세의 일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반대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의 의식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또한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행착오와 타산지석의 지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구한말 일제 식민시대 물살의 주역들 사진을 첨가하면서 책의 리뷰를 마친다.




고종 - 1852년 출생.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1919년 사망하였으며 독살설이 있다. 고종황제 사망은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순종 - 1874년 고종과 민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지적장애가 거론되는 지병이 있다. 1926년 사망.


영친왕 - 1897년 고종과 엄비 사이에서 태어남.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며, 일제에 의해서 어려서부터 일본 유학생활을 함. 일본 황족 출신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


덕혜옹주 - 1912년 출생.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일본 유학생활을 함. 일본에서 결혼을 하였으나 불안과 스트레스로 조현병 발발. 귀국 후 1989년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 1841년생이며 에도시대 말기 무사이자 정치가. 한일병탄의 설계자이며 대한민국 식민역사 비극의 원흉. 1909년 안중근에 의해서 사살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 1852년 출생. 일본 제국 육군이며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 사망 후 통감을 이어받아, 1910년 한일병탄을 직접 수행하였음. 이후 초대 조선총독이 됨.


사이토 마코토 - 1858년 출생. 일본제국 해군 출신. 3.1 운동 이후 무력이 아닌 문화통치를 내세워 3대 조선총독이 되었으며,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하에서 살아남음.


윤덕영 - 1873년 출생.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의 친형.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완용 및 송병준도 넘볼 수 없는 친일민족반역 행위자로 불린다.


이완용 - 1858년 출생. 을사조약, 정미7조약, 경술국치를 이룬 친일민족반역행위 그랜드슬래머. 


송병준 - 1857년 출생.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친일민족반역 행위자로 불린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창시자.


안중근 의사 - 1879년생. 대한제국의 군인,  항일의병장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데 성공. 1910년 일제의 의해서 사형당한다.


강우규 의사 - 1855년 출생. 한의사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19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20년 일제에 의해서 사형당함.


일제 식민역사의 최선봉장 3인 (좌부터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 윤덕영). 마치 나치의 히믈러, 히틀러, 괴벨스를 보는 듯하다.


1905년 을사조약의 주역들인 을사 5적 (좌부터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첫째 아들(이진)을 낳고 우리나라로 귀국 중인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모습. 안타깝게도 불과 며칠 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직전 덕수궁에서 아들이 사망하게 된다.


1919년 고종의 장례식 때 상복을 입은 순종의 모습. 비통한 표정이 역력하다.


곤도 시로스케 - 1875년 후쿠오카 출생. 대한제국 궁내부 사무관으로 특채.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황실비사(원제:이왕궁비사)를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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