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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Sep 22. 2021

내 어머니 이야기 / 김은성 / 2008

애니북스

  진짜가 나타났다. 소설가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닌, 직접 삶으로 체험하고 온몸으로 겪어낸 실제의 이야기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으며, 남쪽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이라 불리는 먼 북쪽, 함경도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전쟁 중 흥남철수를 통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어머니의 기억을 찾아내어 그 생생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비상한 기억력의 어머니, 독창적 작화력과 손재주의 작가, 그리고 민족분단의 역사가 만나 거대한 서사가 탄생하였다. 이 작품은 만화이지만 생생한 이야기이고, 구술이지만 세밀한 기록이다. 나는 이 만화작품을 접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의 힘을 느꼈다. 이러한 느낌은 박완서 작가 이후 처음이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느낌, 그 사건과 그 장소에 타임머신을 타고 간 기분이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작품이 있었다니 놀랍고도 기쁠 따름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기록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중국에는 사기(史記)가 있고, 이스라엘에는 성서(聖書)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이 사관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들어 정리한 1인칭 공인 기록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록의 민족이라 자칭하던 일본은 아예 여기에 끼지도 못한다. 하물며 일성록이나 왕세자들의 일기들, 사대부들의 서간문, 수 많은 양반댁 여인들의 일기 같은 것들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 민족은 어떠한 사실이나 진실을 그대로 남기고자 하는 DNA 가 강하게 심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하니 그 핏줄을 물려받은 작가의 어머니가 고백한 기억력의 자신감은 괜한 소리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총 4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은 작가의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이었던 1900년 초부터 시작한다. 함경도에서 뿌리내린 가족구성원들의 이야기와 작가의 어머니가 성장했던 과정이 주를 이룬다. 2편은 작가의 어머니가 결혼을 하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흥남철수를 하는 장면까지 포함된다. 3편은 작가의 어머니가 남쪽에 정착하여 버티고 일어서서 가정을 일구어내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4편은 대가족의 인생이 마무리되는 과정과 작가의 소소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의 구술자는 어머니이고 작화가는 그 딸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비상한 기억력을 끄집어내어, 현시대를 사는 우리가 알지 못할 북쪽 함경도의 일제강점기 삶과 문화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낸다. 감칠맛 나는 토속어,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시대의 여자들의 헌신적 노력,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귀하게 여기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간 순박한 삶의 모습이 그림으로 펼쳐진다. 현대문학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가 개성과 서울을 잇던 당시 38선의 주변에서 일어나던 일들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면, 김은성 작가와 그 어머니는 함경도에서 태어나 북쪽의 문화를 고스란히 체득한 채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 두 작가들의 노력은 우리 민족의 분단 역사를 고증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마치 지금의 젊은 세대가 퍼즐게임을 하듯, 먼 과거를 더듬어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씩 하나씩 맞추어가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격동의 20세기를 살아낸 평범인이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비범인이기도 하다. 본인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물론이고, 형제자매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마치 100년 전 영상을 찍어놓은 것처럼 상세하게 기억한다. 나는 작가의 어머니를 통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힘을 확인하게 되었다. 기억의 힘은 역사이자 인간의 삶이다. 이 작품은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갔던 이야기를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이란 저 멀리 대가들의 거창한 소설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과 나의 근처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 공감대가 나의 폐부를 뚫고 나의 살갗을 스칠 때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울렁거림 속에서 비로소 가치를 갖는 것이다.  



  저 멀리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에서 살았던 어느 대가족의 일상이 씨줄로 얽히고, 그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에 몸을 던져 버티고 일어서고 성장했던 노력이 날줄로 엮여서 민족사의 기록이 완성되었다. 김영하 작가는 말한다. 이 작품은 절대 잊혀서는 안 된다고. 이 작품은 반드시 보존되어 후세에 길이 남아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경험자의 입에서 나오는 구슬픈 넋두리 한마디, 그리고 독방에서 그려지는 고독한 만화가의 손 터치가 우리의 정신과 역사를 풍요하게 어루만진다.



 훗날 내 아이에게 우리 민족의 비극적 분단사를 설명할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 작품을 건네리라. 귀중한 이야기와 기록을 남겨준 김은성 작가와 그 어머니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참고

TVN 알쓸신잡 시즌3, 13화

http://program.tving.com/tvn/trivia3/1/Vod/View/VOD/EA_541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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