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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Oct 02. 2021

복붙 디스토피아

잘못알려진 명언들과 오용된 인터넷 자료들에 대한 소고.

  최근 대학원을 졸업한 지인의 말을 들어보니, 과제나 리포트, 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이제 완전히 인터넷 자료로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싸이버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 빌려보거나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아도 학사, 박사 모두 취득이 가능한가 보다. 하긴 기레기(?)라 불리는 직종의 일꾼들도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여기저기에 떠돌아다니는 카더라~ 통신 글자들을 수집하여 기사를 내는 시대이니, 애써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는 편이 속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세기 말에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럴싸한 연구과제나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국회도서관이라는 곳을 억지로 다녀야 했고, 대학 도서관에서는 다른 친구들이 책을 먼저 빌려가기 전에 서둘러 자료를 챙겨야 했다. 그 무엇이든 출처표기는 기본이었으며, 철지난 신문기사를 발췌하기 위해서는 대자보사이즈의 무거운 신문철을 꺼내어들고 복사실로 달려갔어야 했다. 여러 저서의 해당 원문들도 반드시 A4 사이즈로 복사를 해서 별도로 첨부 제출한 후, 나는 근거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는 성의(?)가 있어야만 학점에 대한 우위를 차지하고는 했다. 타 학과 학생들의 논문 제출의 행사와도 같은 우리 건축학과의 졸업작품 제작에는 사이트 답사는 말할 필요도 없고, 지역주민들과 관공서 스텝 인터뷰, 그리고 현란한 모형 제작 능력과 정성스러운 프리핸드 스케치의 노고가 필요했다. 무단 발췌나 짜깁기 같은 것은 아예 통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분야였으니, 복붙이라는 개념도 없는 시기였던 것이다.


  최근 각종 미디어나 유튜브에서 다양한 역사 강좌와 방송이 많아지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들의 인문학 분야 관심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도대체 우리가 알 수 없는 몇 백, 몇 천년 전 이야기들의 출처와 근거가 정확한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우리는 그들의 현란한 말재주와 자극적인 영상과 노골적인 연출에 정신을 빼앗기기에 바쁜 듯하다. 빅데이터와 블로그, 각종 뉴스 기사의 인터넷 저장소가 넘쳐나다 보니 사람들이 원하는 자료를 찾기도 쉬워졌지만, 그것이 진짜 자료인지 가짜 자료인지, 손상된 자료인지, 해킹된 자료인지 파악할 시간과 여유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특히 과제를 해야 하는 중고등학생들, 심지어 대학생들조차도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인터넷에서 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그러한 자료들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이 선생들의 귀찮은 임무가 되었다. 온갖 독서 감상문과, 사회현상의 단어들과, 역사적 사건들이 학생들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 공부 깨나 했다는 직장인들이나 파워블로거들의 철학, 사회학, 역사학, 인문학 등의 포스팅에서 인용되는 온갖 격언과 명언들이라는 것들은 알고 보면 영향력 있는 TV 방송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회자된 밈과 짤들의 짜깁기 문구들인 경우도 허다하다.



  문제는 정체불명의 짜깁기 인용문들과 텍스트들이 온갖 일상에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인물이라든지 저명한 지식인들이 실제로 내뱉은 적도 없는 말들이, 이 세상을 떠돌며 여러 가지 콘텍스트가 덧붙여져서 실제 당사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맥락으로 탈바꿈하여 배회한다. 거기에는 통역의 문제도 있을 수 있고 퍼 나르고 맘대로 변형하는 네티즌들의 교활함도 있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 맹자가 살아있다면 아마 지금은 소송 천지일 것이다. 신의 존재가 희미해져가는 최근에는 니체 선생이 로펌을 차려도 될 정도로 주가가 급등하고 있지 않은가.



  근 예로 최근 여러 방송을 타고 공공연하게 유명해진 한나 아렌트의 명언도 이와비슷한 곤경에 처해있는 듯 하다. 짐작해보자면, 방송 작가들이 해당 작가의 의도에 맞도록 어구를 발췌하여 조합한 것일테지만, 문제는 이러한 영향력 있는 방송의 밈들이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너도나도 실제적인 확인없이 마치 자신이 그 책을 읽어보고 발췌한 것인 양 마구잡이로 끌어다 쓴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많은 블로거들에게도 해당되고,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수준의 언론사에게도 해당되니, 수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동일하게 만들어진 어구들이 똑같은 내용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수준높은 기사를 쓴다는 초 엘리트 기자들도 그 흔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어찌 쉽사리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을 그냥 카피해서 끌어다 썼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별도 포스팅 참조)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정보 자체의 가치는 오히려 하락할 수도 있다. 무엇인 진짜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는 일일 수도 있다. 복사가 만연하고 희소성이 사라지는 미래. 고유명사가 줄어들고 일반명사가 판치는 세상. 기사 하나를 읽으려도 해도 이 말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세상. 로뎅은 결국 오뎅이나 뎀뿌라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 운명. 시간이 갈수록 인권(人權)은 드높아진다지만, 어쩌면 그것은 인권이 아니라 거대기업들의 이권(利權)일 뿐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추종하고 구독하고 있는 사람의 언행과 가치관들 자체보다, 그것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진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그 출처와 진위여부가 더욱 궁금해지는 시기가 올 수도 있다.



당신이 보는 것을 전부 믿지 마라.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당신 들은 것을 전부 믿지 마라. 직접 들은 것인 아니라면.

당신이 읽은 것을 전부 믿지 마라. 직접 읽은 것이 아니라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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