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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r 10. 2022

천천히 스미는 / 영미작가 수필집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였던  한국, 일본, 영미 작가들의 수필들은 분위기나 내용에 있어서 아주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한국 작가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식민시대와 6.25 그리고 민주화라는 커다란 역사의 파도 속에 몸을 담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가난과 성공, 속박과 항거, 이념과 갈등의 혼란 속에서 과연 어떠한 자세로 살아왔으며 그러한 흔적들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고백과 성찰 같은 - 일종의 자신을 증언자로 내세우면서 시간을 되돌아보고 극복하고자 하는 감정 같은 것이 주를 이룬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일본 같은 경우에는 역시나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그들만의 독특한 문학사적 분위기와 일본인들 특유의 내면적 응시 같은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역사에 대한 의식이라든지 민족적 특성 혹은 지역적 공간적 사연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주로 계절이라든지 작가가 몸담고 있는 공간의 세밀한 관찰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분석 같은 것이 상당히 치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미 작가들 같은 경우에는 - 물론 유럽과 아메리카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동양적 감정과 의식의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역사적 관점이나 사적인 관찰 같은 내적인 응시라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특성과 본능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각자 처한 자연과 개척의 환경에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살아가는지를 거시적이고 외적인 관점으로 음미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느꼈다. 아마도 이는 단지 수필에 국한되지 않고, 소설이나 문학, 예술 분야에서도 사실 비슷하게 발현되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천히 스미는(봄날의책 출판)'에 포함된 에세이들은 19세기 후반 영미 작가들의 독특한 관찰 의식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느끼게 해주는 수준 높은 컬렉션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 비판과 풍자의 대가인 조지 오웰, 위트 넘치는 필력을 구사하는 마크 트웨인에서부터 오스카 와일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를 비롯하여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맥스 비어봄이나 메리 헌터 오스틴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이었던 변화와 시련의 시대를 살았던 19세기 말과 그 직후 전설적인 작가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뛰어난 사색의 결과가 황홀하게 펼쳐진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 엮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주로 기억에 대한 향취라든지 시간, 회상 같은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으며 자연의 순수함과 진실성을 느낄 수 있는 통찰과 사색의 힘도 거칠게 느껴진다.


... 25년이 흐른 지금도 그 방이 보인다. 내 마음의 눈에 그 모습 그대로. 바로 이 출입구로, 저 격자 달린 네 창문으로 들이치던 햇살, 방으로 내려서는 비틀어졌지만 무척 자신만만한 작은 계단, 울퉁불퉁하던 타일 바닥, 너무 낮았던 서까래, 윌리엄의 동굴에서 끌려 나와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책들, 메리의 정원에서 온 환한 꽃들. 그 서까래와 계단, 타일이 여전히 있다... 빠르게 이어 달리는 음들, 희미하지만 명료하고 장난기 있지만 사무치게 슬픈 소리, 저 먼 과거에서, 아니 바로 이 가까운 어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쾌활한 웃음 같은 소리. 내가 알던 무엇과 너무나 닮아서, 내가 분명 알고 나를 분명 알아보는 듯해서 나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윌리엄 앤 메리 / 맥스 비어봄)


  확실히 19세기 말 작가들의 감각이라는 것은 현대작가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이 머물던 공간의 벽이라는 것은 평면적이고 반사적인 회백색의 콘크리트 표면이 아닌, 거칠고 오래되었으면서도 질감을 가지고 있어서 빛을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뭇결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풍경을 바라보던 방식은 사방이 시원하게 오픈되어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 방대하고 날카로운 통유리가 아닌, 자그맣게 분할된 아치형의 창틀을 통해서 - 마치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듯 나의 밖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 바라본다는 관찰자적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소리를 듣는 방식은 날카롭고 단단한 것들이 서로 긁힌다거나 혹은 모터가 회전하면서 만들어내는 긴장의 소리가 아닌, 적당한 경도를 가진 자연적 재질들이 서로 쓸리고 엮이고 찧어지면서 어떠한 '완충'이라든지 '감내' 혹은 '마모'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유기적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물질의 표면을 느끼던 방식은, 플라스틱, 알루미늄, 실리콘, 아크릴 같은 인공물들의 매끈하고 돌기가 없는 박판의 껍데기 같은 것이었다기보다는 나무와 가죽과, 짐승의 털들과 식물, 종이, 그리고 기껏해야 철로 만들어진 파이프라든지 토기 그릇처럼 거칠고 볼륨이 느껴져서 재질 자체의 물성과 표면에서 드러나는 질감이 일체를 이루는 천연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축약이 되고 디지털화되어서 만들어진 은어라든지 혹은 화려하게 치장된 도식적(圖式的) 말재주가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땅을 향한 근육의 움직임과 삶을 부여잡는 손아귀의 힘이 미사여구 없이 표현된 지질학적(地質學的) 감정이었을 것이다.


"저는 뒤로 빼지도 않고, 보고 보이는 부담도 없이 한 남자와 함께 일했어요. 여자처럼 머뭇대거나 서툴지 않게,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일했죠. 할 수 있냐고, 하겠냐고 필론이 묻지 않았어요. 필론이 하라고 말하면 했어요. 저는 일을 잘했고 우리는 양 떼를 지켰어요. 그게 바로..." 걷는 여자가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다른 것 없이도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들 중 하나예요." "예"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다른 거라뇨?" "아," 그녀는 그 질문에 놀란 듯 답했다. "보고 보이는 것." 나는 걷는 여자로 살아갈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그런 걸 신경 쓰리라 생각 못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비탈에 짓눌린 무성한 풀잎을 바라봤다. 풀잎은 맹렬한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평온한 야수의 털 위에 생기는 물결무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한 세상만큼 오래된 쓰린 아픔이 봄날에 흐느끼며 속삭였다. (걷는 여자 / 메리 헌터 오스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고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대지의 경건함과 만물의 피곤함을 어루만져주는 노을의 따스함과, 고된 노동의 땀을 없애주는 바람의 가벼움을 느낄 수 있었다. 타국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지만, 유년시절을 보내는 감정과 기억의 과정이라는 것은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문득 검정치마의 '난 아니에요'라는 노래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아련하고 어렴풋한 기억이 그 감정의 무게와 질감을 배경으로 하여 나의 눈앞에 환상적으로 나타나는 듯했다. 인간의 기억과 추억은 장엄하고 고귀한 것이었고,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흔적들도 결국 그 사람의 정서를 형성하고 자아를 갖추어나가는 데에 하나하나, 모두 작용하고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이 수필들을 읽는 우리는 아주 천천히 우리만의 고유한 기억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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