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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pr 04. 2022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 1943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것은 인생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저장된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삼라만상 속 대개의 흐름이 그러하듯 한쪽으로 흐르면 거꾸로는 되돌릴 수가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은 캔버스 같은 것이며, 성장하며 나이가 들수록 차츰차츰 자기만의 작품으로 채워진다. 시작은 항상 깨끗하고 비어있는 법이고, 끝은 지저분하고 가득 차 있는 것.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지우개 없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셈이다.


   사람들의 꿈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망쳐버린 그림을 지워버리고 다시 그려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을 더욱 가치 있고 고유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채워나가기 전에 망설이고 고심하고, 뒤늦게 후회하고 뉘우치며 애쓰는 모습은 언제나 우리를 숙연하게 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사막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트라우마가 있었던 유년시절 때문이었는지 혹은 타고난 건각(健脚)으로 인한 역마살 때문이었는지 여하튼 끝없는 지평선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좋아했다. 뭐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주변 풍광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고, 그 어느 것 하나 제 잘난것 없이 동일하게 생긴 모래 알갱이들의 푹신한 느낌이 친숙했다. 맹목적으로 끝없이 걷다 보면 이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나 개인만의 은밀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황홀한 절망의 기대감도 있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경험도 있다. 유난히 프로펠러 비행기를 좋아했는데, 아마도 회전 동력기관에 대한 묘한 관심과 육중한 강철 날개에 대한 경외심이 변태적으로 결합되었을 것이다. 수백 킬로가 넘는 고철 덩어리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요란스러운 힘에 대한 공포심은 다가갈 수 없는 호기심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결혼 후 딸아이를 키우면서 10여 년간 생명의 신비와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적 같은 체험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어느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 작은 생명을 관찰하고 성장의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하였다.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지는 그 시간들과 대자연의 품 안에서 팔딱거리는 생명이 그와 조응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목격하였다. 인간의 웃음이라는 것, 또한 슬픔이라는 것, 회한, 단념, 욕망, 선함, 악함 모두 당사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캔버스는 이제 그려질 가능성만 남아있던 것이었다.   


  생텍쥐베리는 나에게 '사막, 비행기, 고독, 작가, 여행, 죽음'이라는 코드들로 다가왔다. 내가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던 것은 벌써 20년도 넘는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공군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몰았던 비행기는 P-38 F5A. 대학시절 프라모델에 취미를 붙였던 나는, 아카데미에서 출시된 1/48 스케일 모형을 하나 조립하여 푸른 등짝을 가진 모델로 도색했다. 지중해의 바다는 푸른빛의 보호색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생텍쥐페리는 '블루'라는 쓸쓸함으로 남아있다.


  나는 어린 왕자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 속에서, 과묵하고 애정 어린 파일럿의 시선을 느낀다. 비행기를 몰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사막과 바다는 막상 그다지 볼 것이 없겠지만, 만약 어쩌다가 사람이라도 발견한다면 괘씸함 보다는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린 왕자가 여행 중에 사람들을 기대하고 발견하고 맞이하는 모습 속에는 반가움과 호기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혹시 어린 왕자는 생택쥐페리 그 자신이었을까.



만일 내게 53분의 여유가 있다면, 맑은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텐데.....



  어린 시절에 읽었던 어린 왕자는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여타의 고전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은 나이를 먹고 읽을수록 더 깊이 사색하게 만든다. 어쩌면 아이를 키워봤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다. 동심의 발견이라는 것도 중요했고, 유년시절을 관찰하는 과정도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 자신도 성장했던 것이었으며, 나 또한 동일하게 캔버스를 채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발견할 수 없는 단어들과 문장들에서 커다란 무게와 울림을 발견하기도 한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읽는다고 해도 새로운 감정들이 다시 생길 것 같다.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체됨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속도는 나이 먹은 생각의 파고듦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숫자로 돌아간다. 과학자들은 만물을 숫자로 규명하려고 애쓴다. 수학이 우주를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숫자가 없으면 현실에서 상하전후좌우를 구별하기 힘들 것이고, 각자의 재산과 지위와 수명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 약속을 지킬 수도 없을 것이고, 장사를 할 수도, 생계를 이어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가치도 숫자로 표현이 가능한가?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서 허비한 시간 때문에 장미꽃이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된 거란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려 한다. 숫자처럼 셀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그 무엇. 이 세상을 구성하는 수백수천 가지의 동일한 존재들 속에서 유일하게 내가 선택한 것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기쁨이라는 것. 기억을 되돌려보면 새로운 생명의 성장에 쏟아부었던 나의 관심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이 확실하다.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대상은 더욱더 크게 다가온다. 딸아이건, 가족이건, 혹은 집 안의 작은 사물 하나이건 간에 내가 집중하고 바라보고 보살필수록 그것은 나만의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물론 관심이라는 에너지와 고통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역시 자신을 소모하고 빛을 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책을 덮은 뒤 희망이라는 울림을 간직해본다. 우리는 이 슬픈 동화 속에서, 마치 내 옆에서 속삭이고 있을 것 같은 작은 소년이 사라짐을 아쉬워하지만, 어린 왕자의 상자는 아직 손상되지 않았다. 어린 왕자를 길들인 장미꽃의 유약함도, 고삐를 풀고 싶어 하는 양의 본능도, 또한 사막에 불시착한 이방인의 깨달음도 모두 하나의 가능성이다. 


  과거에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갈 만큼 나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될 어린 왕자를 기억한다. 내 마음속 깊은 상자에 양과 고삐를 함께 보관해두었던 비밀이라는 것이, 마치 생텍쥐페리가 끝없는 바다와 하늘과 사막을 비행하면서 가졌을 어떠한 희망과 맞닿아 있다면, 나만의 어린 왕자는 아직도 기대를 가지고 어느 별을 계속 순회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마치 나의 남은 인생의 시간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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