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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ug 15. 2022

문장의시대, 시대의문장 / 백승종 / 2020

  세계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봐도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단면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성리학과 문필의 권세가 나라를 사로잡았던 500년 간의 과거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육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약육강식의 소용돌이에서 지구촌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펼쳐졌던 야만과 전쟁의 문화와 달리 동방의 아주 자그마한 나라에서는, 고도로 정제된 유교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지독한 수양을 쌓은 문인들이 모든 권세를 잡고 나라를 운영하였으니, 첨단 과학기술의 물살을 타고 사는 21세기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울 때가 있다. 물론 무력에 대한 소홀함 때문에 나라를 잃은 적도 있었지만.....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은 그러한 - 우리가 항상 정신적으로 우러르고 본을 받기 위해서 의식하였던 존재, 곧 선비들의 수준 높으면서도 고고하고 때로는 유려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여러 가지 역사적인 배경과 인과관계를 맥락으로 하여 방대하게 펼쳐진다. 저자는 어찌 보면, 일종의 형식과 현학(玄學)일 수도 있는 옛 시대의 문화를 우리 고유의 역사와 가치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로운 주제들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백가지 꽃을 다 심어도 좋으나 

人間百卉皆堪種

대나무 만은 심지 않으리라

惟竹生憎種不宜

화살대는 가고 오지 않으며 대금은 원망스럽기만 하니

箭往不來長笛怨

가장 나쁜 것이 그림 그리는 붓대라, 그리움만 적을 뿐이로다 

最難畫出筆相思  

/ 신위(申緯), 죽미곡(竹謎曲)



  이 책은 여러 문장가들의 활동과 주제를 목차로 구성하여, '시대 속의 문장들'과 '특정 주제속의 문장들'이라는 두가지 카테로리로 구분하였다. 지은이는 백승종 박사로, 지역적으로는 동서고금을 넘나들고 정서적으로는 철학과 정치, 문화를 넘나들면서 여러 책을 저술하고 인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한다. 당연히 책에서는 저자의 명성에 걸맞도록, 우리가 쉽게 알 수 없었던 우수한 문인들의 배경 이야기나 글들을 끄집어내어서, 역사적인 맥락과 해설을 곁들여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고 있다. 



정약용은 유달리 차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혜장 스님과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혜장이 정약용에게 줄 생각으로 차를 만들었는데, 그때 마침 스님의 제자인 색성이 먼저 정약용에게 차를 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혜장은 마음을 바꾸어 정약용에게 차를 보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약용은 장문의 시 편지에 원망하는 말을 잔뜩 써 보냈다. 기어이 차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그대 사는 곳 다산이지요.

況爾棲茶山

온 산에 널린 것이 자색 순 아닌가요

漫山紫筍挺

제자의 마음은 후하건마는

弟子意雖厚

스승은 왜 이리도 쌀쌀한지요

先生禮頗冷

백 근을 주어도 내가 사양은 않을 터인데

百觔且不辭

두 봉지를 주면 왜 안될까요

兩苞施宜竝

/ 정약용이 혜장 스님에게 보낸 편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도처에 널려있는 서양의 고전 문학들과,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자치하고 있는 일본 문학들과, 언어예술의 금자탑을 쌓은 우리나라의 현대문학에서 배제된 조선시대 성인들의 생각과 글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력하게 추천한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는 입시위주의 국어교육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고 볼 수 있는 권채, 박팽년, 남곤, 최한기, 박규수, 이민구, 이안눌, 권필, 백인걸 같은 문풍 레전드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어찌 솔깃하지 않을런가. 



  죽마고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서애 유성룡의 글을 끝으로, 우리 고유문화의 미학을 드러낸 흥미로운 책 리뷰를 마친다.


한산도와 고금도라

閑⼭島古今島

넓은 바다에 두어 점 푸른 섬이로다

⼤海之中數點碧

때가 되자 백번 싸운 이 장군 계셨다오

當時百戰李將軍

한 손으로 친히 하늘 한쪽을 부여잡으시고

隻⼿親扶天半壁 

고래를 모두 죽이자 피가 파도를 물들였네

鯨鯢戮盡⾎殷波

맹렬한 불길로 풍이의 소굴까지 불살랐다지요

烈⽕燒竭馮夷窟

공이 높아지자 질투와 모함 벗어나지 못하셨으니

功⾼不免讒妬構

목숨이란 기러기 털 같은 것, 어찌 아끼셨으리오

性命鴻⽑安⾜惜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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