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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Oct 27. 2022

황금열매 / 나탈리 사로트 / 1963

열림원 출판사 / 2002년 12월 1판 1쇄 절판.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수많은 사공들의 군상을 떠올린다. 사공들이 배의 목적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 서로서로 이야기를 듣고, 목적지를 정한다. 하지만, 그 목적지는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배에 올라탄 여러 사공들은 다양하다. 권위와 자의식에 사로잡혔다든지 혹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구습의 굴레에 찌든 사공도 있다. 나침반을 보기도 하고 자기만의 논리로 열정을 토로하며 목적지를 주장하는 사공도 있다. 배는 흘러 흘러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배는 마침내 닳아 없어지고 파괴되어 사람들만 남는다. 그 사람들은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날 배를 찾는다. 


나탈리 사로트의 '황금열매'는 문예비평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을 쫓아가는 무의식의 소설이다. 우리가 흔히 소설을 접하던 방식으로 읽어내기가 힘들다. 이 책은 주어 대신 '그들'이나 '저들', '당신네들' 같은 대명사로 처리한 인간군상들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살핀다. 소설 속 '황금열매'라는 책이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반응의 주체들은 실로 다양하다. 그 주체들은 소설 여기저기에 무작위로 분포되어 뿌려진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그 주체들의 이름도, 얼굴도, 장소도, 맥락도 알 수 없다. 사건의 인과관계도, 이야기의 흐름도 모두 부재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들'은 그저 단순하게 오로지 '황금열매'를 평하기 위하여 그 문단 속에만 덩그러니 놓인 일종의 해프닝들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소음 차단이 전혀 안된 어느 객실에 앉아, 여러 군데의 옆 방들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어떠한 주제'에 대한 '어떠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이야기를 몰래 듣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이 누군지도,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지만, 계속 듣다 보니 나는 그 '어떠한 주제'가 생성되고 숭배되고 조롱받으며 부침을 겪다가 결국 쇠락하는 과정과 잔상을 경험한다. 결국 그 이미지, 잔상이 중요했던 것.


우리는 모두 각자의 콜라병을 들고 각자의 해석을 내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렇듯 나탈리 사로트의 '황금열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코믹한 담론과 해프닝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예술작품이 인간 군상의 두 손 위에 둥실 떠서, 막상 그 껍질 내부의 내용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채 표면 생치기 하나 없이 상상으로만 존재할 법한 하나의 신비로운 황금의 사과처럼, 하나의 심벌로 생성되고 의식 속에서 일면 '평론의 소재'나 '평론가들의 도구'로 굴러다니다가 결국 소멸되는 씁쓸한 운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순수한 예술 작품, 속이 꽉 찬 매끄럽고 둥그런, 그 자체로 끝난 이 물체. 이물질이 스며들 수 있는 틈새도 긁힌 자국도 없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외곽의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외곽의 조각조각은 모두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빛에 의해 밝혀져 반짝거린다.


나탈리 사로트는 인간의 내면에 스치는 다양한 접촉과 그에 반응하는 '굴성(屈性)', 즉 '트로피즘(tropism)'을 파고든 작가로 유명하다. 의식의 다양한 스침과 충돌,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내면의 진동과 파편의 무작위적 반응들을 끄집어내는 필치가 돋보이는 작가이다. 기존의 방식을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로 '누보로망'의 대표작가로 불리기도 한다. 마치 식물이 해를 향해서 줄기를 뻗어나가듯, 자신만의 고유한 감성과 미의 기준으로 작품을 향해 뻗어나가려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에서, 나탈리 사로트 만의 지독하고 지적인 풍자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저들이 사용하는 그 가소로운 단어들을 좀 보라니까...... 탄탄한 구성에 수식 없고 건조한 '두뇌적인' 것은 다 기피하고 오로지 본능만을 따르는...... 그리고 그 본능에 의해 그들은, 누워서 네 다리를 쳐들곤 다정한 목소리만 들려도 낑낑거리는 강아지들처럼, '진실된' 것에, '아름다운' 것에, '살아있는' 것에 금방 반응을 보인다니까......


예술작품, 공산품, 이념, 사상, 이익, 질서 같은 열매를 위해서 사람들은 입장을 취한다. 그러한 여러 입장들, 각자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시시각각 색이 변하고 맛도 변하고 익는 시기도, 썩는 시기도 다른 열매를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 영원불멸의 '황금열매'라는 금단의 사과를, 작가는 도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가의 짖굳은 필치는 '황금열매' 라는 책의 생성과 소멸을 둘러싼 이야기 '황금열매'를 중의적 해석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 속의'황금열매'와 이 소설 제목인 '황금열매'를 동일시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과즙이 흐르는 사과를 먹자고 달려드는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이 와삭 베물다가 이를 부러뜨려야 해.


예술에 대한 평가, 인식에 대한 담론의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평론가들과 모든 비평가들이 느끼고 깨달아야 할 점이 많은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지만, 마치 이름 모르는 타인들이 옆에서 재잘거리는 것을 흘려듣는다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훨씬 편하다. 사람도 스토리도 배경도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가볍게 읽다 보면 전체의 윤곽이 저절로 머리에 남게 되는 소설이다. 이런 작품은 나탈리 사로트 밖에는 쓸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정말 난해하고 불편하고 신선한 작품이었다. 이제 그녀의 심연으로 들어가 볼 이유가 생겼다. 이것은 공학도에게 또 다른 세계이다. 물론 나 또한 나탈리 사로트라는 황금열매를 깨물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황금열매는 말이 없다. 하지만, 충분한 말과 반응들을 만들어낸다. 마치 트윈픽스의 더기존스처럼.



PS : 이 책은 절판되었다. 하지만 온라인 중고시장에는 조금 있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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