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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Oct 30. 2022

독야청청, 대을용 2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식물의 생명력은 경이롭다. 동물의 생체보다 단순하다고는 하지만, 동물은 맨 몸뚱이로 혹한의 겨울에 단 몇 시간이라도 벌판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면에서 보자면 나무를 비롯하여, 이것 저것 거미줄 같은 신경체계가 들러붙은 고밀도의 단백질 덩어리가 아닌, 가볍고 심플한 섬유질로 구성된 식물의 존재 구조란 부침이 심한 인간의 운명과 비교하여 숙연한 모습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다.


2015 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 것을 기념하여 분양받은 대을용이 어느덧 7년간 나와 함께 해주고 있다. 한낱 기념품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은 것이라도 되는 듯, 그 앙상한 최초의 골격과 살집의 운명을 극복하고 보란 듯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생명체라도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래전 박경리 선생이 언급하던 생명의 경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었을까.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더라도 그 움직임 속에는 생을 향한 고통스럽고 처절한 몸부림이 숨어있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생명이라는 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내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은 달라지는 것이겠지. 멋모르고 받아 든 우리의 인생이라는 각각의 운명.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만하는 의무의 고귀함이 뒤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대을용, 페레난데스, 혹은 천국의 계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분양받을 당시 최초의 모습은 마치 지그재그로 구부러진 철사의 형상이었다. 마치 나처럼 너저분한 사내의 볼품없는 증오심 같은 것이 느껴져서, 막연한 동질감이 투영되었으리라. TV 장식장 옆에 마치 조형물 같은 의미로 존치되어 있던 이 녀석이 이제 생명이란 무엇인지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생명이라는 것. 끈질기고 거부할 수 없고, 어떻게든 짐 지고 가야 하는 혹 같은 애물단지. 그래,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같이 가야 한다. 아마도 그 과정 속에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내자.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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