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back Dec 23. 2022

여행자 시리즈 / 김영하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다. 선택하지 않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지구라는 행성에서 잠깐 숨을 쉬고 살다가 심장이 정지하면 다시 어디론가로 떠난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다. 


  여타의 여행기와는 다르게, 김영하의 여행기는 우리를 자신의 여행지로 친절하게 초대하지 않는다. 이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외톨이는 자신의 시선과 생각을 자신의 발과 카메라에 투영시키고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운 채 잠시 스쳐가는 세상을 느낀다. 독자는 그의 시선과 목표물을 엿볼 뿐이다. 마치 어느 폐쇄적인 감옥에서 수십 년 이상 갇혀 지내다가 나온 사람처럼 그는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흔한 움직임을 응시하고, 익명적으로 파묻히는 자신의 존재를 개인적으로 향유할 뿐이다. 독자들에게 꾸준하게 죽음과 현실에 대해서 일깨워준 작가의 고요하고 무심한 듯한 관조는, 나름대로 힘껏 애쓰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한 여러 생명들, 즉 모든 여행자들에 대한 애잔한 헌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찍은 사진들의 도시풍경은 마치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마련된 묘비석을 닮았다. 


   그는 지중해에 수천 년간 버티고 선 신전들을 바라보며 신화와 영광이 아닌, 현실의 파멸과 죽음을 생각한다. 그의 발이 닿는 곳은 인간이라는 여행자들이 조금이라도 신의 위상을 느끼려고 온몸으로 애쓴 곳들의 잔해가 널브러진 곳들이다. 그가 직시하는 것들의 끝에는 언제가 죽음과 허무가 있다. 도쿄의 조시가야 묘지에 비친 아름다운 햇살도, 하이델베르크 거리의 어느 상점에 진열된 이름 모를 사람들의 아크릴 큐브 조각들도, 혹은 시칠리아의 에리체를 스쳐간 모든 역사의 설화들까지도 모두 여행자들을 넋을 위로하는 송가처럼 들리는 것은,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느끼는 삶의 현실이라는 것이,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죽는 것인가. 


  그의 책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카메라의 영향이 컸다. 유난히 사진을 좋아했던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살아난 느낌이었다. 20년 이상 필름사진을 찍어온 내가 특별히 아꼈던 롤라이35를 쓰고 있어서 반가웠다. 여행을 사진처럼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다소 건조하고 딱딱한데, 오히려 이것은 김영하 작가의 성향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된 그럴싸한 상징들이 아닌, 그 장소와 그 거리에 시제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마주하는 흔하고 오래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렌즈에 포착된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분주한 인생들의 쓸쓸한 잔해들이 어떠한 마지막을 향해 각자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말 없는 군중 속에 안보이듯 스며들어, 그저 그런 현대의 도시인 중 한 명이 되어 거리를 활보하는 사색가. 유한한 인생과 허무, 죽음이라는 숙명을 끌어안은 채 마치 파르테논 신전 바닥의 한 줌 모래처럼 바람에 흩날릴듯한 여러 신화들의 흔적들을 밟고 지나가면서 그는 우리에게 무엇이 정착이고 무엇이 여행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바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거부하면서도, 오롯하게 마련된 시원한 맥주 한잔과 도쿄의 작은 뒷골목에 마련된 상점들에 대한 칭송을 마다하지 않는 세심한 여행자에게서, 나 또한 이 행성에 살아가는 무심한 여행자로서의 미시적 동류의식을 느낀다. 


  어쩌면 이미... 누구나 진행하고 있을지 모를 '여행'이라는 것. '나' 하나라는 객체가, 나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조감적 시선이 아닌, 수십억 중의 다양한 '나' 들 중에 '그저 쓸쓸한 하나'가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섬에 불시착한 기분으로 자신만의 카르페디엠을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기쁨. 이렇게 새로운 여행기를 선사해준 작가가 있기에 오늘도 즐거운 상상들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저격수는 멈춰있는 대상을 노린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표적을 지켜보다 조용히 한 방

향수 역시 머물러 있는 여행자를 노린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의

위험한 저격수를 피하기 위해

신중한 여행자는

어지럽고 분주히 움직이며

향수가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방심한 여행자가 일단 향수의 표적이 되면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한 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며

마냥 깊은 우물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속에 자기가 찾는 모든 것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세상의 모든 우물이 그렇듯

그곳은 비어 있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보다, 읽다, 말하다 / 김영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