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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ug 20. 2023

발칙한 그녀들 / 히구치 이치요 외

인내와 복종을 강요받고 살아온 근대 여성작가들의 단편들이다. 메이지 시대를 갓 졸업한 20세기 초의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젠더갈등이 마침내 꽃을 피웠다. 꼭꼭 숨어 드러날 수 없었던 성차별 문화와 그 속에서 몸부림치던 여성들의 날카로운 의식이 작은 한 권에 책에 고스란히 압축되어 모였다. 이것이 바로 문학 컬렉션이다. 출판사 편집부의 노력이 돋보이는 기획작품이다.


한(恨)이라는 매개 속으로 억압과 굴종의 정서가 함몰되어 들어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젠더갈등과는 달리, 이 작품집에서는 분노와 일탈로 응축되는 결과론적 마침표를 발견할 수 있다. 억누르는 만큼 부풀어 오르는 풍선효과의 제로섬 게임에서 아시아의 여성들은 결국 글이라는 도구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알 수 없었으리라.


안으로 삼킨 고통을 똑바로 응시한 채, 최대한 응집시키고 결정화하여 자신만의 에너지로 분출하려는 이 걸출한 작가들의 명단편들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변화가 가져오는 여성의 지위가 어떠한 물결을 타게 되는지 예상할 수 있게 된다. 19세기부터 서구에서부터 고양되기 시작한 여성인권에 대한 반향이 아시아에서 꽃 피운 것은 1900년대 초였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확장과 전쟁의 폐해로 인한 후유증은 일본의 여성인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로 남았으니, 이 작품 속 잔다르크들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 시절에는 운이 좋으면 복권에 당첨되고 운이 없으면 꽝이 나오는 것처럼 누가 남편이 될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깨진 반지 / 시미즈 시킹)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나라와는 다른 문화 속에서 일본의 여성이 갖는 의식과 일상에 대한 태도는, 지극한 통증을 수반한 채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날카로운 시선과 명확한 의식을 유발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오히려 여성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시대의 남성적 권위주의 사회상황에 대해서 독자들이 더욱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7인의 작가들은, 당시 기라성 같은 일본 남성작가들의 물결 속에서도 뚜렷하게 자신의 색채를 지닌 채 섬세하고 유려한 필력을 확보한 대가, 아니 투사들이라고 칭하고 싶다. 하야시 후미코의 명작 '철지난 국화'를 읽고 있노라면, 그녀의 날고기 같았던 처절한 삶의 재가 쌓이고 굳어져 남성과 그를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노련한 여인의 현실적이고도 차가운 태도에 슬픔이 수반되기도 한다. 강렬한 단어 몇 개 만으로도 심상과 처절함의 정서를 완벽하게 그려낸 다무라 도시코의 '생혈'이라든지, 도발적 충동으로 마음속에서 도파민을 불러일으키는듯한 히구치 이치요의 '배반의 보랏빛' 같은 작품은 당시 여성들이 넘어야 했던 전통과 변화 사이의 울타리가 얼마나 모질고 높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현재의 생활은 어쨌든 남자에게 종속되어 가고 있었고 그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여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여자가 가고자 하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맹세한 닛타 역시 지금의 생활이 여자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날카롭고 왕성한 예술 감각으로 밝고 활기차게 지냈던 마사코가 기운이 없고 안색도 창백해져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닛타는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되도록 번잡한 집안일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지만 그런 노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닛타는 인내와 신념으로 열심히 집안일을 해나가는 애처로운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을 놓고 그냥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생활 / 다무라 도시코)


기획작품의 면모라는 것은, 독자들이 흔하게 접할 수 없었던 시기에 숨겨진 어떠한 단단한 정서가 고스란히 화석이 되어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기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쪼록 산업혁명 이후 끊이지 않았던 여성인권과 젠더이슈에 대한 또 다른 면모를 접할 수 있는 아주 값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좌층상단부터 히구치 이치요, 시미즈 시킹, 오카모토 가노코, 미즈노 센코, 하야시 후미코, 다무라 도시코, 미야모토 유리코


금붕어의 작은 눈을 핀으로 찌르자 손목 부근에서 꼬리지느러미가 파닥거렸다. 비린내 나는 물방울이 유코의 연보라색 오비로 튀었다. 금붕어를 너무 깊숙이 찔렀는지 핀 끝이 유코의 검지에 닿았다. 루비 같은 작은 핏방울이 손가락 끝에서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금붕어의 비늘이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붉은 반점이 마르면서 점차 윤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금붕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죽었다. 꽃무늬 부채를 펼친 듯한 꼬리지느러미가 오그라들더니 축 늘어졌다. (생혈 / 다무라 도시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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